한 건설노동자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결국 사망했다. “죄 없이 정당하게 노조 활동을 했는데, 집시법 위반도 아니고 업무방해 및 공갈이랍니다. 제 자존심이 허락되지가 않네요”라고 그는 유서를 남겼다. ‘심리적 G8’에 이르렀다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들의 심리는 세계 최정상 8봉 가운데 하나에 올랐는지 몰라도 내 마음은 바닥을 뚫고 한없이 추락한다. 도대체 그들의 심리와 나의 심리가 이렇게 ‘하늘 끝, 땅끝’만큼의 차이가 있단 말인가.
비록 나와는 달라도 같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만큼은 남겨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조선일보>가 나의 그 안간힘조차 걷어찼다. 당시 현장에 있던 주변 동료들이 분신 노동자를 말리려고 하지 않았고, 심지어 유서까지 대필한 의혹이 있다는 주장. 누군가는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위해 목숨을 던지고, 대부분은 그걸 보며 참혹해하는데, 다른 누군가는 그렇게 스러져간 목숨을 조롱한다. 같은 인간이 아닌 건가, 아니면 인간들 중 일부는 이렇게 잔인하고 흉물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32년 전의 그날이 스쳐간다. 1991년 4월에서 6월 사이. 참 많은 이들이 목숨을 던졌다. 그때도 <조선일보>는 그 죽음을 조롱했다. 그때도 이른바 ‘유서대필’ 의혹을 띄웠고, 과학을 빙자했던 자들과 공안당국의 협잡 속에서 이 공작은 잠시간 성공하기도 했다. 온갖 고난을 거쳐 재심을 받았고 최종적으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여러 인간을 수치심의 지옥으로 밀어넣었던 자들이 이에 대해 사과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 웬걸? 32년 후 같은 짓을 반복한다. 당시의 목격자가 지금의 CCTV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게 우리가 도달해 있는 민주주의와 지성의 수준이다.
누군가의 자존심을 존중하고, 그 수치심에 공감할 수 있는 이라면, 보통의 사람들이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지 못한다. 설혹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나와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게 보통 인간의 성정일 것이다. 의심하는 게 기자의 몫이라고? 의심도 두 갈래로 나뉜다. ‘그럴 리가 없다’는 의심과 ‘그럴 수 있다’는 의심. 1991년의 그들은 ‘그럴 수 있다’는 의심을 키워서, ‘그래야 한다’고 밀어붙인 자들과 함께, ‘그랬던 것 같다’는 결론을 억지로 끌어냈다. 하지만 역사는 ‘그럴 리가 없다’는 의심이 훨씬 더 정당했음을 확정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의심과 ‘그럴 수도 있다’는 의심은 결코 동일한 값을 갖지 않는다. 전자는 보통의 심성과 지성을 가진 이들의 것이고, 후자는 범죄와 공작에 더 친숙한 자들의 것이다. 스스로 그럴 수 있는 자들이기에, 당신들도 그 의심의 대열에 뛰어들라고 손짓한다. 죽음을 결심했던 그 건설노동자는 “혼자 편한 선택을 한지 모르겠다”며 미안해했다. 수치심과 자존심, 그리고 지성을 가진 이들에게 끼얹어진 이 모멸감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