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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무명’, 고뇌를 등진 스파이
정예인 2023-04-26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상하이에서는 정체 모를 이들이 곳곳에서 출몰한다. 중국 각 지역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위세를 과시하는 일본과 모국인 중국 사이에서 정치적 입장을 택해야만 했던 존재들. 일본인 와타나베 경관(히로유키 모리) 아래서 근무하는 허 주임(양조위) 역시 그중 한 사람이다. 와타나베의 신임을 얻기 위해 같은 민족을 적극적으로 심문하던 허 주임. 그는 사실 공산당을 재건하여 중국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하는 의도를 숨긴 스파이다. 허 주임은 같은 공산당원이면서 아내이기도 한 미스 천(저우쉰)과 비밀리에 접선하며 첩보 작전을 이어가지만, 정체가 탄로나며 위기에 처한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하이마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자 와타나베는 또 다른 심복인 예 선생(왕이보)을 동원해 허 주임을 비롯한 적을 처단하고자 한다.

청얼 감독은 2016년에 발표한 <라만대극소망>에 이어 <무명>에서도 상하이를 무대로 삼았다. 서구 열강의 조계지이자 중국 공산당의 발원지이며 일본에 점령당한 지역인 상하이는 경계인의 존재론을 그리기에 더없이 좋은 배경이었기 때문일 터다. 청얼 감독은 <색, 계>나 <태양의 제국>을 비롯한 여타 작품에서 적잖이 노출된 상하이의 이미지에 <무명>만의 색채를 덧입히기 위해 미장센을 치밀하게 구성했다. 그 덕에 각국 패권이 치열하게 경합하는 상하이의 모던한 모습이 감각적으로 구현됐다. 역사적인 사건 복판에 놓인 인물들의 상황을 시간순으로 배치하기보다 퍼즐처럼 조각내 뒤섞어 배치한 부분도 흥미롭다. 영화 전반부에는 이해되지 않던 시퀀스의 의미가 극의 후반부에 다다라서 완성되는 식이다. 이는 관객의 감정적 몰입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한편 내러티브에 숨은 진실을 궁금하게 유도하는 기능을 해낸다. 다만 극 중 핵심이 되는 스파이 설정을 도식적으로 묘사한 점은 아쉬움을 남긴다. 특히 마지막 시퀀스의 부연 설명은 스파이의 입체성을 반감시킨다. 스파이는 경계를 넘음으로써 경계 너머를 상상하는 존재다. 그럼에도 <무명> 속 스파이는 고뇌를 마주하기보다 그저 당의 이념을 충실히 따르는 인물에 머무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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