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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당신의 전성기는 지금입니다
김성찬 2023-04-26

이번 비평은 마치 내게 평론은 여기서 끝나도 인생은 계속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이하 <슬램덩크>)가 개봉 후 흥행을 이어간다는 소식에 시큰둥했던 건 사실이다. ‘29년이 지난 이제 와서 굳이 왜?’ 하는 마음이 앞섰고, 흥행은 일부 추억에 젖은 <슬램덩크> 열혈 팬들이 보여준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이 글을 쓰지 않았다면 끝까지 보지 않았을 것이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경향신문>에 연재하는 칼럼에서 <슬램덩크> 흥행의 이유를 분석한다(‘강유정의 영화로 세상 읽기’-“중요한 건 변하지 않은 마음”, 2023년 2월10일자). 거의 최초로 문화를 주체적으로 향유하던 이른바 X세대가 향수를 바탕으로 젊은 시절 즐겼던 문화 콘텐츠를 소환했고, 아래 세대에게 전파했다는 것. 또 이런 현상은 <탑건: 매버릭> 때부터 기미가 보였고, 그 배경에 부조리하고 힘겨운 현실이 있다는 점까지. 훗날 오늘의 <슬램덩크> 열풍을 되돌아보더라도 강유정의 견해는 정설에 가까울 것이다. 이 분석에 십분 동의하는 터라 반론을 제기할 건 없어 보인다. 다만 <슬램덩크>뿐 아니라 이 작품과 유사한 서사를 지닌 영화 <리바운드> 와 나이키 에어 조던 운동화의 탄생 비화를 다룬 영화 <에어>의 등장을 보면서 몇 가지 더할 말은 있을 것 같다. <슬램덩크> 개봉 후 흥행을 분석하는 말도 이미 다 펼쳐진 만큼 지금부터 쓰는 말은 정설에 가까운 담론에 붙는 보론 정도로 보면 족하겠다.

다시 그리는 과거

단지 스포츠를 소재로 했다고 해서 <슬램덩크>와 <리바운드>, 그리고 <에어> 세 영화를 한데 묶는 게 무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개별 사건들에 실은 공통된 배경이 있는 경우를 자주 접한다. 세 영화의 공통점은 농구를 다룬 스포츠영화이면서 모두 과거를 소환한다는 사실이다. 또 단순히 소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거를 다시 그리거나 재정의한다. 주지하듯 <슬램덩크>는 저 유명한 북산고와 산왕고의 혈전을 재현하는데, 주된 시선의 주인공은 강백호가 아니라 송태섭이다. <리바운드>는 신문 구석에서 발견했을 만한 2012년 부산중앙고의 이변 소식을 스크린으로 적극 불러낸 사례다. 영화 <에어>는 말한 대로 아직 신인이었던 마이클 조던을 모델로 기용한 운동화 에어 조던 시리즈의 탄생과 성공 신화를 다시 쓴다.

눈여겨볼 점은 세 영화가 과거와 관계하는 데 아카이브 이미지를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먼저 <슬램덩크>를 두고 웬 아카이브 운운인가 의문을 표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에는 송태섭의 전사를 설명하려는 방안의 하나로 VHS 비디오가 재생되는 화질을 묘사해 작화함에 따라 아카이브 이미지 효과를 주는 장면이 포함돼 있다는 걸 기억할 것이다. 이 장면의 효용이라면 원작 만화의 이야기 범위가 방대해 한편의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담아내는 데 불리한 점을 완화해준다는 거다. 원작을 아는 관객은 주요 인물의 전사를 이미 알기에 큰 문제가 아닐지 몰라도 <슬램덩크> 흥행에 힘입어 처음 관람한 관객은 인물별로 흩어진 자잘한 서사에 산만함을 느낄 우려가 있다. 또 주요 인물 모두에게 동등한 분량의 서사를 준다면 원작을 알고 있는 관객이라도 흥미를 잃을지 모른다. 여기서 아카이브 이미지가 지닌 사실성은 송태섭의 정서에 관객이 더욱 감정 이입할 수 있도록 은연중에 돕는다.

<리바운드>도 아카이브 이미지의 사실성을 활용한다. 부산중앙고 농구부의 대회 준우승 이변을 최초로 보도한 기사가 해당 농구부의 사연을 <슬램덩크>에 비유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산중앙고 농구부의 사정은 <슬램덩크>와 겹치는 구석이 있다. 영화 초반 배규현 (정진운)과 정진욱(안지호)이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처럼 그린 건 강백호와 서태웅의 관계를 떠오르게 해 쓴웃음을 짓게도 하는데, 작품은 원작 <슬램덩크>의 축약본 같은 데다 마지막 결전에 무게를 둔다는 점에서 본의 아니게 <슬램덩크>가 흥행한 시기와 맞물려 동어반복처럼 비칠 수 있다. 따라서 <리바운드>의 흥행 여부를 점치는 건 도박에 가깝다. <슬램덩크> 흥행에 도움을 받아 같이 흥행하거나 반복되는 인상으로 인해 외면받을 것이다. 다만 후자를 예상하는 사람이라도 <리바운드>의 후반부가 보여준 시퀀스만큼은 인정하거나 적어도 <슬램덩크>와 갈라지는 지점이라는 데는 동의할 것이라고 본다. 영화는 작품을 마무리하면서 정작 마지막 결전을 관객에게 보여주진 않는다. 다만 극 중 인물과 실제 인물의 과거 이미지를 디졸브하듯 겹쳐서 보여준다. 실화를 다룬 작품이 영화 말미나 쿠키 영상으로 실존 인물의 초상이나 사건이 일어난 장소의 이미지, 또는 텍스트화한 후일담을 보여주는 경우는 흔하다. <리바운드>가 보여준 활용법도 인물별로 아카이브 이미지로 변환하는 일을 더하고 통상 이상의 길이로 후일담을 덧붙인다는 점 외에 크게 다를 건 없어 보이지만 효과는 상당하다. 이미지로서 그림과 사진과 영상에 우열을 가리는 건 어불성설이겠지만 대중이 기사로 접한 이야기가 사진 이미지에 부여한 푼크툼이 이처럼 강렬히 작동한 사례도 흔치 않을 것이다.

한편 <에어>가 기댄 아카이브 이미지의 사실성은 문제적이다. 이 영화도 실화를 다룬 여타 작품과 그 결이 크게 다르지 않은데, 후반부 나이키의 스카우터 소니(맷 데이먼)가 마이클 조던 가족을 상대로 경쟁사인 컨버스와 아디다스가 아닌 자사와 계약하도록 설득하는 장면에서 아카이브 이미지의 쓰임은 인상적이다. 소니는 관객의 자리에서 볼 때 마치 앞으로 일어날 마이클 조던의 생애를 모두 아는 사람처럼 보인다. 관객이야 조던이 영광의 시대만 누리지 않았고 다양한 실패를 겪고 많은 구설수에 올랐던 사실을 알고 있지만 계약 당시를 재현하는 영화가 우리에겐 과거이고 등장인물에겐 미래인 이미지를 몽타주하는 건 묘한 느낌을 선사한다. 구체적으로는 소니에게 예언자적 신비로움과 경이감을 제공하면서 이 계약 자체가 신성한 일인 듯 바라보게 한다. 달리 말해 윤색의 혐의가 있다. 영화는 마이클 조던이 운동화가 팔리는 만큼 일정 비율의 개런티를 보장받는, 당시 계약 관습에 어긋나는 요구를 한 게 기업이 독점하던 수익을 배분했다는 점에서 공정한 결단이었다는 식으로 추켜세우는 분위기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 이후 마이클 조던 가족이 나이키와 협상하며 벌였던 사업의 역사를 보자면 일정 비율의 수익 고수는 권리 쟁취가 아니라 계산적 행보로 볼 정황도 충분하다. <에어>는 과거를 재정의하는 과정에서 불거지는 윤색의 혐의를 변론하듯 아카이브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이다.

확신의 언급들

그러니 만약 같은 스포츠영화라 하더라도 <에어>가 <슬램덩크> <리바운드> 두 영화와 다소 떨어져 있다고 판단된다면 그건 <에어>가 나머지 두 영화만큼 선수의 박진감 있는 플레이 장면을 덜 사용하거나 설득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주제를 품어서가 아니다. 원인은 아카이브 이미지 활용의 저의가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에어>가 <슬램덩크>와 <리바운드>와 달리 무언가 미진한 연유 하나를 더 발견할 수 있다. 이 점을 말하려면 잠시 한병철의 <정보의 지배>로 우회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는 이 책에서 ‘진실의 굳건함’이 사라지고 ‘정보의 덧없음’만 남은 현 세태를 진단한다. 인공지능 챗지피티가 판결문도 쓰고 논문도 쓰는 시대, 부지불식간 극소수에게만 부가 집중하는 사회에서 평범한 이들은 대체 어디로 가 어떻게 운신해야 할지 모른 채 알고리즘이 제시한 길을 따라갈 뿐이다. 바꿔 말해 알고리즘이 없다면 확신 따위는 없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방향성을 잃고 제자리를 맴돈다. 영화만 해도 그렇다. 콘텐츠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끝도 없이 쏟아지는 작품을 만난다. 어디서 무얼 봐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할 때 플랫폼은 알고리즘에 따른 콘텐츠 순위를 보여주고 우리는 그 이름만 얘기하고 다룬다. 값진 작품은 콘텐츠의 홍수 속에 파묻혀 다른 것들과 구별하기 힘들게 되고, 자력으로 찾아내기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여기서 <슬램덩크>나 <리바운드> 같은 영화들이 관객이 감격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도록 유도한 대목을 주목해야 한다. 그건 바로 확신에 찬 언급들이다. <슬램덩크>에서 강백호는 안 감독에게 감독님의 전성기는 언제였냐고 물으며 자기는 지금이라고 말한다. <리바운드>에서도 강 코치(안재홍)는 선수들에게 확신에 차 말한다. 농구는 여기서 끝나도 인생은 계속된다고. 알고리즘은 우리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알고리즘의 일부분이 되라고 말할 뿐이다. 이에 비해 <에어>에는 유사한 언급들이 없다. ‘저스트 두 잇’은 조던이 아니라 나이키가 만든 말이다. 대명사 ‘에어 조던’에서 ‘조던’이 빠진 ‘에어’가 제목인 점에서 보듯 조던은 의도적으로 가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단어 ‘에어’조차 소유권이 불분명하다. 소니의 수사야말로 확신의 언급이지 않겠냐는 반문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또한 <에어>에서 드러난 아카이브 이미지의 쓰임과 기능이 유사하다. 그의 말은 선수를 향한 진심이라기보다 자본주의의 명령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강백호와 강 코치는 한병철이 <정보의 지배>에서 인용한 푸코의 파레시아, 그러니까 ‘참된 민주주의를 이끄는 두 원리 중 하나로서 진실을 향한 의지와 용기를 바탕으로 참이라 생각하는 바를 말하는 것’을 실행하는 사람이자, 정보가 만연한 체제에서 이상의 시 <오감도> 속 아해들처럼 방향성 없이 헛돌며 질주하는 우리에게 갈 곳을 가리키는 등대 같은 존재는 아닐까. 방향성은 없고 초조하기만 한 일상, 계시가 되거나 용기 같은 것들을 북돋워 줄, 영화에 나왔던 것처럼 바로 지금이 전성기라든가 인생은 계속될 거라는 식으로 손가락이 오그라들지는 몰라도 뒤로 숨기는 일 없는 말들이 긴요하다. 정답이 아니어도 좋다, 지나고 나서 후회해도 괜찮다, 적어도 이 순간 불안하지 않도록 확신을 준다면 그걸로 족하다. 지금 스포츠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것, 아니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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