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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의 오!컬트 <랜드 앤 프리덤>
2002-06-05

생명의 긍정

켄 로치 영화를 보는 건 개인적으로 불편하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홍상수 영화를 볼 때 느끼는 불편함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얼마 전 <빵과 장미>를 볼 때도 그랬다. 그래서 어쩌자구. 만국의 용역청소원이여 단결하자구? 용역청소원의 고단한 운명을 비껴가게 해준 하느님께 감사하자구? 아니면 이제부터 사무실의 내 자리는 스스로 열심히 쓸고 닦구 하자구? 도대체 넌 뭐야,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멍청이 부시보다 긴 줄에서 내 앞으로 새치기해 들어온 사람에게 더 큰 증오심을 느끼고, 점점 더 커지는 오존층의 구멍과는 아랑곳없이 그 달 날아올 카드빚 청구서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제3세계 아동 노동착취에 분노한다면서도 아디다스에서 맘에 드는 운동화가 나오면 사고야 마는 내가 켄 로치 영화를 좋아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난 할리우드 상업영화도 헤헤거리고 잘 본다. 물론 이것도 좀 얄팍하고 비약이 심한 논리일 수 있다. 운동권 대학생 도덕불감증, 이런 제목으로 운동권 남녀 대학생들이 혼숙하더라고 대경실색하는 기사를 내보내는 어떤 신문과 비슷한 냄새가 나기도 한다(그 기사를 쓴 기자는 분명히 대학 시절 친구들이 엠티가서 ‘혼숙’할 때 자기 집 안방에서 엄마 젖을 빨고 있었을 것이다. 우웩!).

“너에게 켄 로치 영화는 나태함으로 텁텁한 입 안을 헹궈줄 스민트 사탕 같은 거 아냐?”라고 빈정거린다면 별로 응대할 말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나는 켄 로치 영화를 좋아한다. 젊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화미학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노조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토론하기를 권유한다는 켄 로치 아저씨도 내가 팬이라는 걸 싫어할지 모르겠지만 뭐, 상관없다. 나를 알지도 못하는데…. <레이닝 스톤>이나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도 인상적이었지만 여전히 아찔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건 <랜드 앤 프리덤>이다. 아, 혁명을 이야기하다니. 혁명이란 체 게바라 티셔츠만큼이나 달콤하고 섹시한 농담 아니었나. ‘그땐 그랬지’식의 회고담이 멀미날 만큼 넘치는 지금 ‘싸움에 나서라’고 윌리엄 모리스의 시를 읽는 이 아저씨는 누굴까. 대학교 때 동아리에서 세미나를 하면 “학생이 하라는 데모는 안 하고 왜 세미나질만 하냐?”고 어떤 복학생 선배가 실없이 던지곤 하던 농담 이후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주변에서 누군가 침 튀기며 혁신과 진보를 이야기할 때 ‘코밑에 삐져나온 코털이나 집어넣고 말하시지’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곤 했던 나는 영화가 끝나자 극장 구석으로 가서 무릎 꿇고 손들고 앉아 있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터내셔널가>가 나오고 운동가 그룹의 노선투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장면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이 영화는 정치적 메시지를 날리는 ‘캠페인’영화로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 앙드레 말로의 <인간조건>을 읽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상황이 안 좋아질수록 “우리는 이길 거야”라는 말이 반복되는 주기가 더 빨라지는 데서 이들의 공고한 신념과 불굴의 투사정신이 아니라 번민이나 불안함 같은 게 어른어른했다. 싸움은 신념이 아니라 운명이 되고 그들은 희망의 상실이나 번민을 행간으로 닫아놓은 채 정해진 길을 따라 묵묵히 걸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지독한 배신을 경험하고 처절한 패배를 했지만 데이비드가 전장에서 담아온 흙을 죽을 때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이유도 그가 투철한 사회주의자라서기보다 결국 버릴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것을 말로는 생명의 긍정이라고 말했다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켄 로치는 지금도 열심히 좌파영화를 만들고 내 주변의 누군가들은 열심히 혁신과 진보를 이야기하고 있으며(머리는 혁명가이고 몸은 공무원인 사람들까지!!) 나는 열심히 그들의 콧구멍을 지켜보고 있다. 세상은 바뀔까? 소심한 내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삼가도록 하자. 김은형/ <한겨레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