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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흐르다', 삶의 여러 격정마저도 그저 흘러갈 시간일 뿐
정재현 2023-03-29

서른이 된 진영(이설)은 취업 준비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집 안에서도 진영은 맘이 편치 않다. 무뚝뚝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 형석(박지일)과는 거의 대화를 하지 않고 살가운 어머니 해수(안민영)에게도 톡톡대기 일쑤다. 진영은 워킹 홀리데이를 이유로 취업 스터디를 그만둔 스터디원을 본 후, 올해가 자신이 워킹 홀리데이를 떠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알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 살림은 물론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 살림도 맡아 운영하고 가족 내 대소사도 모두 신경 쓰던 어머니가 급작스레 사망한다. 생전 어머니가 맡았던 일들을 하나하나 배우고 정리해가며 진영은 소원했던 아버지와 점점 함께 시간을 보낼 일이 늘어간다. 잘 풀릴 듯하던 형석의 공장은 점점 상황이 어려워지고, 진영의 워킹 홀리데이 출국일은 점차 가까워온다.

<흐르다>는 제목을 꼭 닮은 영화다. 영화는 진영과 그의 가족이 겪는 몇 차례의 극적인 사건들이나 진영이 느낄 법한 몇 차례 격한 감정들을 힘주어 강조해 찍는 대신, 삶의 여러 격정마저도 그저 흘러갈 시간일 뿐이라는 듯 담담하게 담아낸다. 영화의 핵심인 진영과 형석의 관계 진전 또한 마찬가지다. 두 부녀는 호들갑스럽게 가까워지거나 눈물겹게 이별하지 않는다. 다만 묵묵히 각자의 일을 하다 서로의 곤경을 해결해주고 여전히 서로에게 동일한 이유로 실망과 기대를 반복할 뿐이다. <흐르다>가 절대 흘려보내지 않는 것이 있다면 연출과 시나리오의 디테일이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뀜에 따라 변해갈 수밖에 없는 인물들의 사소한 행동이나 캐릭터들이 위치한 공간의 속성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응시하며 영화 속 인물들과 그들이 처한 상황 모두를 진짜라 믿게 만든다. 김현정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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