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이 가장 오래 머무는 책상 위, 보육원 출신 여성청년 공동체의 공예품인 원목 도마와 어린 시절의 사진이 놓여 있다.
- 2022년 연말에 텀블벅에서 오디오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론칭 프로젝트가 올라왔을 때 놀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정희진’과 ‘팟캐스트’는 생소한 연결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처음 공개된 ‘편집장의 인사’에서 팟캐스트를 라디오라고 칭하시더군요. (웃음)
= 전 아직도 앱이 뭔지 잘 모르고 팟빵 오디오 매거진에서 제안이 왔을 때 팥빵이라고 검색해봤어요. 뭐, 덕분에 팥빵 칼로리를 알게 되었지요. 매체라는 것이 잡지, 라디오, 팟캐스트, 텔레비전 같은 것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우리 몸을 확장시키는 모든 것들을 의미하죠. 매체가 너무나 많아지면 다들 자아가 비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 한 사람이 발전주의, 자본주의를 저지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 속에 뛰어들어 협상에 참여할 수는 있겠죠. <정희진의 공부>에서는 지구가 이미 파산했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으리란 심정으로 공부할 겁니다. 그러니까 기왕이면 팟빵 오디오 매거진에서도 김어준씨 독자보다는 김혜리 선생님의 독자가 많은 게 세상에 좋은 거겠죠. 무슨 말인지 아시죠? 이거 쓰셔도 됩니다. (웃음)
- 지난 25년간 신문, 방송 인터뷰도 대부분 거절하고 오직 글쓰기와 오프라인 강의 위주로 활동하셨는데 팟빵은 선생님을 어떻게 설득했습니까.
= 지난 몇년 동안 한국 사회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소진되고 환멸에 시달렸어요. 극도의 절망,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이 필요한 시기에 팟빵에 발목이 잡힌 거지요. 긍정적인 의미의 앵커링(anchoring)이라고 할까. 거기다 가장 중요하게는, 이렇게 기본급이 보장되는 일을 하면 그 덕에 연구와 논문에 집중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잖아요. 나이가 들어 이제는 강의를 너무 많이 하면 지쳐요.
- 벌써부터 <정희진의 공부>가 보탬이 되어 선생님이 원하는 글쓰기를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작업하길 바라는 응원의 댓글들이 보입니다.
= 저는 원래 강단에 설 마음이 추호도 없었어요. 첫째, 우리나라 대학교에 취직을 하면 글을 못 써요. 잡무가 너무 많으니까. 둘째, 시간강사를 하면 내가 학생들에게 미칠 영향이 너무 두려웠어요. 그런데 어쩔 수 없이 했지요. 생계는 중요하니까. 내가 바라본 한국 대학 사회는 지금 지식 생산이 불가능한 구조예요. 그리고 학교가 인문학자를 양성하지 않는데 역설적으로 대학 내외부에는 인문학자가 너무 필요한 상황입니다.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의 고통도 봤어요. 요즘 대학생들이 가장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글쓰기가 자기소개서인데 그걸 쓰지 못해서 너무나 괴로워합니다. 보다 못해 자기소개서 쓰는 수업을 열었어요. 명색이 대학 강의인데 강의명을 ‘자기소개서 쓰기’로 지을 순 없잖아요? 그래서 이름을 이렇게 붙여봤죠. 자기 재현의 윤리. (웃음) 저는 이제 전통적인 의미의 지식인은 완전히 사라진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저만 해도 스스로 단 한번도 연구자, 학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프로필에 그렇게 쓰여 있다면 그건 만드는 분들이 정리해주신 거고. 전 그저 어떤 연구를 지향하는 사람이지요. 그외 어떤 정체성도 없어요. 유일하게 있다면 당비만 내는 녹색당 당원? ㅇㅇ동 주민?
- <정희진의 공부>는 총 5개의 코너로 전체 5~6시간 정도의 분량으로 꾸리셨더군요. 가장 먼저 어떤 코너부터 생각하셨어요?
= ‘한 장면의 인생’이죠. 모든 영화는 인문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앎의 쾌락과 약간의 통증’은 원래 ‘우리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제목이었는데 나중에 바꿨습니다. 카피 뽑는 일엔 능숙해요. 신문 칼럼 보낼 때도 소제목까지 전부 다 써서 보냅니다. 편집자는 노동을 덜해서 좋고 나는 가장 정확한 제목으로 칼럼이 전달되니까 좋고. 한참 일을 많이 할 때는 일주일에 <한겨레>에 한편, <경향신문>에 한편, 두 신문에 글을 같이 썼어요.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피해자들이 하는 말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를 정권 교체기에 정치 보복이 반복되는 한국의 현실 정치에 적용하고, <머니볼>의 1루수가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순간은 “공이 나한테 올 때”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인생을 감당한다는 것의 의미를 살핍니다. 오직 대사 한줄로 영화 밖의 새 우주가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 전 그게 좋아요. 누구에게나 인상 깊은 대사 하나쯤은 있지요. 한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 우리는 이미 그 영화의 내용을 다 아는데 또 굳이 거기에만 끼워 맞출 필요는 없지 않나요? 대사 하나, 표정 하나, 어떤 순간 하나가 함유하고 있는 굉장한 구조가 있잖아요. 그런 것을 보고 싶죠. 전형적인 고기능성 우울증인 저는 그저 살아갈 뿐, 1초도 인생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머니볼>의 많은 대사 중에서도 거기 꽂힌 거죠.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메일을 보내주었어요. 멀쩡한 얼굴을 한 아픈 사람들이 사회에 많은 거지요. 다음에 한번은 <나의 해방일지>를 다루려고 해요. ‘추앙’을 도대체 어떻게 번역하겠어요? ‘worship’이라고 하기엔 추앙은 너무나 복잡한 말이지요. 사랑도 존경도 존중도 아닌, 추앙이 무엇인가에 대해 10시간은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에서 나온 대로, “나를 써야만 비로소 획득되는 맥락” 혹은 “벼랑 끝에 서서 바라보는 부분적 관점으로의 읽기”가 선생님의 영화 비평이 갖는 독창성의 핵심이군요!
= 제가 가르치는 게 소통 불가능성의 인문학이에요. 우리 몸이 모두 개별적이고 각자가 처한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소통이란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어떤 접점에서 만나는 거지요. 소통을 마치 ‘힐링’처럼 강조하는 사람은 인문학과는 거리가 멀고 조심해야 해요. 몸의 개별성에 대해 조금만 안다면 그 불가능성부터 사유해야죠.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고 느낀 무력감과 열패감에 관한 글도 기억납니다. 그 영화에 관해선 다들 아름다움에 대해 쓰기 바빴는데요.
= 동성애 영화는 대부분 클래스 문제를 빼놓고 말하죠. 그러면 발전할 수가 없어요. 많은 동성애자들이 가난하고 그들 내부에서도 엄청난 격차가 있는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 그런 것들은 전부 소거되어 있고…. 무엇보다 세상에 그렇게 완벽한 부모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웃음) 학자인데 영화 속에 공부하는 장면이 단 하나도 없잖아요.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걸 마주할 때의 감정을 쓴 거예요. 같은 사안에 어떻게 감정을 느끼는가가 그 사람의 정치학을 보여줍니다. 이성과 감정의 대립은 허상이고, 감정이야말로 정치의 최종심급이기 때문이지요.
-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배적인 객관성 개념에 나의 목소리를 보내고 조율하고 틈새를 내는”(<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글쓰기를 실천하면서도, “자신을 버리고 언제나 상대방(타자)이 되는 삶” 혹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정희진의 공부> 2월호 토크 콘서트 ‘사도 바울과 인문학’) 것은 과연 동시에 가능한가요?
= 나를 비운다는 것은 나를 변형(transform)한다는 의미도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상대방이 되고 또 다른 무언가가 되는 거죠. 제가 ‘혼합’이라는 단어를 좋아해요. 한자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 물 ‘수(水)’ 자가 섞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은, 한번 섞이면 절대 돌이킬 수가 없지요.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나로만 머물지 않고 자꾸 나를 비우고 상대방에 빙의하자는 겁니다. 질적인 변화를 이루는 거지요. 혼합 중 제일은 말을 섞는 것이라 생각하고요. 우리가 말을 제대로 섞고 난 뒤의 친밀감, 그로 인한 변화는 굉장하지요.
*이어지는 기사에 인터뷰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