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31번째 작품,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가 공개됐다. MCU 페이즈5의 포문을 여는 이번 작품은 시리즈 <로키>에서 처음 등장했던 새로운 빌런, 정복자 캉(조너선 메이저스) 캐릭터를 제대로 소개하고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등에서 본격화됐던 멀티버스와 시간선의 개념이 앞으로 MCU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는 아이언맨의 죽음 이후 MCU의 행보를 불안하게 지켜보는 세간의 시선에 마블이 취한 입장을 보여준다.
별 볼 일 없는 이혼남에 전과자였던 앤트맨/스캇 랭(폴 러드)의 인생은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전투 이후 180도 바뀐다. 어벤져스의 전투를 회고한 자서전 <작은 녀석을 조심해!>(Look Out for the Little Guy!)가 출간될 만큼 샌프란시스코에서 그의 명성은 이미 슈퍼스타급. 와스프/호프 반 다인(에반젤린 릴리)이 아버지와 설립한 핌앤드반다인 컴퍼니의 양자 연구도, 전편에서 재회한 재닛 반 다인(미셸 파이퍼)과 행크 핌(마이클 더글러스) 부부는 물론 호프와 스캇의 로맨스도 모두 순조롭다. 예기치 못한 변수는 스캇의 딸 캐시 랭(캐스린 뉴턴)의 수감이다. 약자들의 인권을 위해 시위를 주도하다 경찰서에 갇히기도 하는 그는 현시점에선 누구보다 영웅에 가까운 일을 하는 존재다. 이번 영화의 또 다른 제목을 ‘앤트맨과 와스프와 캐시’라 명명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할 무렵,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캐시의 남다른 호기심이 평탄한 일상을 뒤흔든다. 양자 영역에 신호를 보내 이를 스캔하는 장비를 개발한 캐시가 기계를 가동하자 스캇과 호프, 재닛과 행크, 캐시까지 모두 양자 영역에 빨려들어가게 된다.
실패인가 현명한 선택인가
2015년 <앤트맨>의 매력은 MCU의 대규모 전투와 대비되는 소시민성과 타율 높은 유머에 있었다. <앤트맨과 와스프>는 양자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 좀더 어려운 양자물리학 개념을 필요로 하지만 ‘헬로 키티’ 장난감을 이용해 적을 무찌르는 재치를 놓치지 않았다.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는 8년 동안 쌓아왔던 시리즈의 개성을 과감하게 확장한다. 가족을 위해 분투하는 부성애는 여전히 핵심 감정으로 존재하지만 전체적인 룩은 MCU의 계보에서 B급의 키치함을 가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에 가깝다. 전자현미경부터 7080 헤비메탈 잡지 사진까지 다양한 이미지를 레퍼런스 삼아 완성한 48개의 세트는 서로 이질적으로 충돌하며 더 이상해지길 갈망한다. 이 무대에 선 캐릭터가 가장 소시민적인 영웅 중 하나인 앤트맨이라는 점에서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는 더더욱 위화감 있는 스페이스 오페라에 가깝다. 주어진 과제도 의도적으로 가볍게 처리한다. 케빈 파이기가 ‘멀티버스 사가’라고 부르며 새로운 챕터를 이끌 중심 빌런 정복자 캉은 향후 3년간 10편 이상의 영화와 5편 이상의 시리즈에 등장할 예정이다. 무한한 시간선을 지배하며 무수한 어벤져스 영웅들을 죽인 것으로 보이는 그는 타노스 이상의 위력을 예고한 것에 반해 그리 위협적이진 않다. 타임라인을 관통할 수 있는 능력은 시간이 무의미한 양자 영역에서 제대로 발휘될 수 없고, <로키> 등의 시리즈를 학습하지 않은 관객에겐 그의 존재 자체가 생소하다. 대신 영화는 재닛의 과거 장면을 통해 양자 영역과 캉 캐릭터의 배경을 충실히 설명한다. <스타워즈> <스타트렉> <닥터 후> 시리즈에 크게 빚진 우주 왕국과 크리처들의 비주얼은 종종 아이디어 부족이 아닌 취향적 고집으로 읽힌다. <앤트맨>의 대런 크로스/옐로재킷(코리 스톨)이 다소 우스꽝스러운 비주얼을 가진 모독(M.O.D.O.K. 모두를 살생하기 위해 만든 독립 유기체)으로 돌아와 이 영화에 몇몇 재치 있는 순간을 만들지만, 전편의 감초 역할을 했던 스캇의 친구 루이스의 빈자리를 채울 정도는 아니다.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는 태생부터 주어진 과제가 많은 프로젝트였다. 기본적으로 MCU는 전체 세계관에 조응하되 아예 처음 접하는 관객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이어야 하고, 향후 벌어질 사건과 신진 캐릭터를 소개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 더불어 <앤트맨>시리즈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타노스 이상의 영향력을 가진 새로운 빌런을 소개하고 멀티버스 사가의 기반을 개념적으로 다져야 한다. 하지만 마블 스튜디오는 토크쇼 <지미 키멜 라이브!>와 발칙한 성인 애니메이션 <릭 앤드 모티>의 제프 러브네스에게 시나리오를 맡기는 의외의 선택을 했다. (제프 러브네스는 페이즈6의 핵심 작품인 <어벤져스: 캉의 시대> 시나리오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안전한 길보다는 새로운 개성을 선택한 결과,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는 내적 완결성과 서사의 유기성을 확보하는 대신 이질적인 요소들이 덜컹거리며 봉합된 무난한 작품이 됐다. 이것은 마블의 실패일까? 그렇게 단언하기는 힘들다. 다만 MCU를 제대로 따라가기 위해 복잡한 타임라인을 오가며 확장되는 콘텐츠를 기꺼이 보려는 관객이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케빈 파이기가 이끄는 마블 스튜디오가 기꺼이 좁은 취향의 군집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 점이 흥미롭다.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는 MCU가 선택한 ‘멀티버스’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의미 있다. 앤트맨이 베스킨라빈스 사장이 된 평행 우주가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는 종종 무거운 과제에 비해 <스타워즈>나 <닥터 후> 시리즈가 존재하는 우주를 근간으로 만든 블록버스터 팬무비처럼 보인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샘 레이미의 색깔과 무관할 수 없었고, <왓 이프…?>는 아예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한편 끊임없이 쏟아지는 디즈니+의 시리즈는 세계관 확장보다는 기존 작품에 등장했지만 중점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던 캐릭터들이 중심에 선 경우가 많다. <에코>는 <호크아이>의, <애거사: 코븐 오브 카오스>는 <완다비전>의 스핀오프 시리즈이며 <아이언 하트>의 주인공 리리 윌리엄스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에 등장한 바 있다. 지금의 마블은 다양한 취향의 우주를 펼쳐놓는 잡화점의 자세로 페이즈를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마블의 신작을 둘러싼 호불호 논란도 어쩔 수 없이 강화될 것이다. 이는 팬데믹을 거치고 OTT가 활성화되는 일련의 변화 속에서 점차 파편화된 소비 행태와도 맞물린다. 전세계가 특정 콘텐츠에 열광하기보다는 고도화된 추천 알고리즘과 커뮤니티의 영향을 더욱 받는 시대, 마블이 쌓아온 유산과 거대 자본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듯 이렇게 시대와 조응하고 있다.
양자 영역의 존재 가능성?
양자 영역은 소련의 미사일 공격을 막는 과정에서 재닛 반 다인이 갇혔던 공간으로, 행크와 호프는 양자 영역에 진입할 수 있는 터널을 만들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양자 영역에 들어갔다가 양자 얽힘(원자보다 작은 두개 이상의 입자가 동시에 두 장소에 있는 것, 다시 말해 통일된 양자 상태로 연결된 양자역학적 상태)을 겪었던 스캇이 재닛만이 전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해오면서 양자 터널에 얽힌 실마리도 풀리기 시작한다. 마블의 세계관에서 양자 영역은 마법 혹은 핌 입자를 통해 갈 수 있고, 원자 이하로 작아져야 도달할 수 있는 이곳에선 시공간에 관한 모든 개념이 무의미해진다. 물론 인간이 원래 크기보다 훨씬 줄어들 때 제대로 된 신진대사를 이어갈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앤트맨>과 양자 영역에 관한 상상은 허무맹랑하지만은 않다. <앤트맨> 시리즈의 과학 자문을 맡은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의 양자물리학자 스피리돈 미칼라키스는 “원자보다 더 작은 아원자 영역은 무한한 가능성의 장소,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법칙과 자연의 힘이 결정화되지 않은 대체 우주”(<뉴욕타임스>)라고 말했다. 원작 만화에서 ‘마이크로버스’라고 불리던 이곳의 이름이 양자 영역으로 바뀐 것은 판권 문제와 얽혀 있다. 마이크로버스를 지키는 히어로 마이크로너츠의 영화 판권이 마블이 아닌 유니버설에 있기 때문에 MCU는 새로운 명칭을 떠올려야 했고, 스피리돈 미칼라키스가 직접 ‘양자 영역’이란 이름을 떠올렸다. 다양한 우주로 연결될 수 있는 양자 영역의 존재 가능성은 MCU 페이즈4에서부터 본격화된 멀티버스의 개념을 흥미롭게 확장시킬 수 있다.
트릴로지의 마지막 편은 무엇이든 시도한다!
페이턴 리드 감독은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를 통해 MCU의 <스파이더맨> 3부작을 완성한 존 와츠 감독에 이어 슈퍼히어로의 트릴로지를 모두 이끈 두 번째 감독이 됐다.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시리즈를 향한 애정을 고백했고 디즈니+ <만달로리안> 시즌2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던 그가 결국 이번 영화에서 구현한 우주가 <스타워즈>의 그것과 닮은 것은 예고된 수순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이번 영화의 이질적인 톤에 좀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감독 개인이 3부작 구성에 대해 갖고 있는 철학이었다. “세 번째 영화를 찍는다면 반드시 전편과 차별화해야 한다. ‘앞의 두편이 좋았지만, 세 번째 편에서 무엇이든 시도’하며 트릴로지의 일반적인 법칙을 거스르는 아이디어가 좋았다.”(<할리우드 리포터>의 페이턴 리드 감독 인터뷰) 그 결과 “<앤트맨>과 <앤트맨과 와스프>가 캐릭터와 환경에 집중했다면, 이번 영화는 거대한 빌런과 만나면서 가장 서사적이면서 친밀한 작품” (의 페이턴 리드 감독 인터뷰)이 될 수 있었고,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는 다중 우주와 미시 세계를 오가는 복잡한 물리학 법칙과 소박한 가족 서사를 자유롭게 가로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