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챗지피티(ChatGPT)의 시대이다. 챗지피티로 과제를 작성한 것이 적발되어 전원 0점 처리가 된 국내 국제학교 학생들부터 챗지피티가 논문의 저자가 되는 것을 금지하기로 했다는 해외 학술지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소식이 들린다. 미국에서는 챗지피티가 의사면허시험과 로스쿨 시험을 통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열심히 하는 페이스북에는 이런 소식들뿐만 아니라 챗지피티에게 질문을 해서 받은 답변과 그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공유하는 포스팅도 가득하다. 이럴 때 나라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또 이럴 때 챗지피티에 묻어서 평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봐야지 싶다.
챗지피티를 둘러싼 호들갑을 보면 알파고가 떠오른다. 2016년 우리를 충격에 빠뜨렸던 그 알파고 말이다. 세계 최고의 바둑 기사 이세돌을 이기고 우리 사회에 4차 산업혁명 광풍을 몰고 온 인공지능. 그런데 당시 한국고용정보원에서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대체할 가능성이 높은 직업으로 콘크리트공, 제품조립원, 청원경찰, 장비조작원, 택배원 등을 꼽고(육아도우미도 있었다!) 화가, 사진작가, 작가 및 관련 전문가는 자동화 확률이 가장 낮은 직종으로 예측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블루칼라’를 대체할 줄 알았던 인공지능이 불과 몇년 사이에 ‘화이트칼라’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니?
그러나 전형적인 화이트칼라인 나는 챗지피티가 두렵기는커녕 반갑다. 물론 순전히 인공지능이 나의 지적 노동을 대신할 수 있는가라는 차원에서만이다. 나는 챗지피티가 고도로 발달한다고 해도 나와 같은 글을 쓸 수 없으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인공지능이 성형외과에 들어가서 몇년에 걸친 참여 관찰을 하고 성형수술을 직접 경험한 후 글을 쓸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챗지피티는 역설적으로 몸은 기계로 쉽게 대체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만의 고유한 지식을 만드는 가장 창조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나도 예측이라는 걸 해보자면 이렇다. 챗지피티가 대신 써줄 수 없는 글은 몸을 통해서 지식을 얻는 이들, 보편으로 여겨지지 않는 몸을 가진 이들, ‘현장’을 연구하는 이들의 글일 거라고. 과학 논문의 초록은 쓸 수 있겠지만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매일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자폐 진단법을 정리해줄 수는 있겠지만 부모가 아이의 사회성이 다름을 어떻게 알게 되는지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겨울철 조류 동시 센서스 결과를 알려줄 수는 있겠지만 조사원이 새의 개체 수를 어떻게 세는지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챗지피티에게 “당신은 10년 전에 성형수술을 받았다. 당신의 경험을 기술해 달라”고 요청하자 “죄송합니다만 AI 언어 모델로서 저는 개인적 경험이나 신체적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누가 AI 언어 모델을 두려워하는가? 외국 언론의 기사를 거의 번역하다시피 해서 혹은 보도 자료를 짜깁기해서 기사를 쓴다는 기자들? 혹은 다른 이의 논문이나 저서를 읽고 잘 정리하는 것을 연구라고 부르며 글을 생산하는 학자들? 그렇다면 외치고 싶다. 챗지피티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