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곡에서 잡아낸, 보기만 해도 숨찰 정도로 좁고 가파른 오르막 길,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똥퍼~”를 외치는 아저씨, 자칫 엉덩이에 끼고 마는 ‘똥꼬바지’를 입고 자랑스러워 하는 친구….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70년대 말·80년대 초 가난한 달동네의 추억과 정겨움을 전략 삼은 복고풍 코미디다. 기획단계에선 〈친구 2〉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이 영화는 훨씬 더 순박하고 소박함이 돋보인다. 〈해적…〉에는 나쁜 사람이 없다. 예를 들어 세 주인공인 해적, 봉팔, 성기는 허구한날 패싸움으로 날을 보내는 삼총사지만, 이들이 자라서 거리의 조폭이 될 것 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가장 싸움을 잘하는 해적(이정진)은, 길에서 한눈에 반한 첫사랑이자 봉팔의 여동생인 봉자(한채영)를 술집에서 구출해오기 위해 팔자에 없는 디스코 연습에 나서는 인물이다. 조금 모자라 보이는 봉팔(임창정)은 사고로 자리에 누운 아버지를 대신해 학교를 결석하고 똥을 푸러 다니는 한없이 착한 친구다. 성기(양동근)는 중동으로 일 떠난 아버지와 춤바람 난 어머니 밑에서 반항적인 아이지만, 그 반항은 어딘지 어설프다. 아쉬운 점은 인간적이고 소박한 인물설정이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임창정을 제외하곤 두 배우의 개성이 영화에서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시원한 춤을 기대한 사람들에겐 실망스러울 정도로 모자란 디스코 경연대회 장면도 그렇다. 대신 〈해적…〉에선 이들의 허술함을 빛나는 조연들이 메워 준다. 왕년의 댄스왕이었지만 지금은 똘마니들을 데리고 조깅을 하며 서울우유병을 빠는 이대근. 해적의 순수한 사랑에 감동해 디스코 대회 1등을 조건으로 봉자를 데려가도록 약속하는 큰형님역에 그만큼 어울리는 배우를 떠올리기 힘들다. 또 단발가발을 쓴 채 “원, 투, 쓰리…” 스텝을 밟는 제비형 정은표, 좀스럽고 야비한 배사장 안석환, 똥 푸는 아버지 김인문, “아름답소”를 외치는 나이트 똘마니 주명철 등 무게있는 연기자들이 ‘그 시대’ ‘그 동네’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해적…〉에서 어두운 시대, 가난한 동네의 현실은 따뜻함에 가려져버린다. 하지만 인간군상들이 펼치는 세련되지도, 과장되지도 않은 이야기에선 ‘진정성’이 느껴진다. 이런 진실함이 〈해적…〉을 작위적이지 않고 밉지 않은 코미디로 만들어주는 이유일 게다. 특히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감정을 자극할 수 있었던 표현들을 많이 자제한 전반부는 욕심없는 신인감독이 이뤄낸 큰 미덕으로 보인다. 김동원 감독은 자신의 단편 〈81, 해적 디스코왕이 되다〉를 장편으로 만든 이 영화로 데뷔했다. 6일 개봉. 김영희 기자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