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 앞을 내다보기가 어렵다. 영상 엔터테인먼트 산업 종사자 64인에게 2023년의 트렌드를 물었을 때 가장 많이 돌아온 답변은 “트렌드가 없는 것이 트렌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바야흐로 큰 흐름을 짚는 메가 트렌트의 시대는 가고 소비자의 분화된 요구에 맞춘 마이크로 트렌드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에 발맞춰 시장에 대한 전망과 2023년을 진단하는 키워드도 다양한 관점과 의견이 쏟아졌다. 극장의 위기 등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도 필요한 과정이라는 답변과 지속 가능한 연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동시에 나왔다. OTT 플랫폼의 경쟁은 한층 심화되었고, 극장은 자신의 필요를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으며, K콘텐츠의 위상과 진격은 이제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할 상황이다. OTT 전쟁, K콘텐츠의 글로벌 공략 등 2022년에 시작된 변화의 물결이 지속되는 가운데 새로운 버전의 변화들이 감지되고 있다. 업계 종사자 64인에게 물은 2023년의 흐름과 전망, 글로벌라이제이션, 프랜차이즈와 시즌제, K콘텐츠, 팬덤, 양극화까지 2023년 다가올 미래를 다섯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보았다.
(※설문참여자들의 멘트를 직접 인용하여 재구성하되 멘트별로 당사자의 이름을 직접 기재하지는 않았다.)
코로나19 이후: 회복과 변화 그리고 불확실성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들이 펼쳐지는 중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지나가면 모든 것이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나아진다는 건 코로나 이전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코로나 이전의 모델, 정확히는 극장 중심의 구조가 똑같은 형태로 유지되기 어렵다는 걸 다들 깨달았다. 달리 말하면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뉴노멀은 팬데믹이 닥친 직후가 아니라 터널의 끝이 보이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2022년은 극장가의 회복세가 두드러졌다. 코로나 이전으로 완전히 돌아가긴 어렵지만 수치만 따져봤을 땐 한때 80% 수준까지 회복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량적 수치가 가장 좋았던 2019년 극장 매출 2조원, 극장 관객수 2억명 시대가 다시 올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전망이 지배적이다. 특히 상황을 낙관할 수 없는 건 관객의 인식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티켓 가격 상승과 함께 극장의 대체재라고 할 수 있는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시장 역시 빠르게 적응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2023년 이후의 전망을 이야기할 때 압도적인 다수의 관계자들이 불확실성을 꼽는다. 과거의 데이터와 패턴들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고, 빠른 속도로 변화에 적응 중인 시장을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관계자들의 전망도 다채롭게 펼쳐졌다. 조심스럽게 회복을 전망하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불가피한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설사 시장이 회복된다고 해도 이전과 같은 형태는 아닐 것이며 숏폼 콘텐츠 등 영상을 소비하는 방식 자체의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의견이다. “2023년에도 이용자의 취향과 검색 동향 등 맞춤 추천 콘텐츠인 인스타 릴스를 통한 콘텐츠 유입 또는 역주행 등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극장 공간에 대한 인식 변화가 동반될 것이라는 예상도 이어졌다. 그 중심에는 소비자에 맞춘 다변화 모델이 있다. “극장이 사라진다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던 형태의 극장은 더이상 없을지도 모른다.” 변화된 세상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따라 누군가는 연대하고 누군가는 빠르게 전환할 것이다. 다변화의 관점에서 이른바 “메가 트렌드를 따르고 예측하는 게 무의미해지는 시대”가 왔고 마이크로 트렌드를 파악해야 할 시대가 왔다. 취향의 분화와 플랫폼의 다변화, 까다로워진 소비 형태에 맞춰 다양한 모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공존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OTT의 옥석 가리기와 양극화
2023년 3월 공개를 앞두고 있는 <더 글로리> 파트2. 파트별 순차 공개로 플랫폼에 대한 관심과 충성도를 이어나가고 있다.
“2022년까지가 도전과 물량의 시대였다면 2023년은 반응이 좋았던 작품들의 새 시즌들이 준비되거나 소개되는 시기”다. 2022년 넷플릭스의 독주가 끝나고 OTT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했다. 2022년이 치열한 라인업 확보 경쟁으로 달아올랐다면 2023년은 성공한 모델을 중심으로 보수적인 투자를 하는, 이른바 옥석을 가리는 시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콘텐츠 수급을 위해 과다 경쟁하던 OTT 플랫폼들은 누적된 적자로 인해 페이스 조절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양질의 콘텐츠가 아니면 가차없이 외면받는 시장의 특성상 물량 공세보다는 웰메이드, 장기 시즌화가 가능한 콘텐츠들에 대한 투자는 더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OTT 플랫폼의 경쟁이 심화함에 따라 결과도 뚜렷한 양극화를 보이고 있다. 극장산업에서 천만 영화를 중심으로 한 편중 현상이 문제가 되었던 것처럼 OTT 플랫폼의 결과물 역시 평균이 실종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 양극화, 승자 독식에 따라 콘텐츠 소비의 쏠림현상이 심화될 것이고 이에 따라 생산자(창작자) 입장에서 다양성에 대한 고민이 많아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에 따라 디즈니+, Apple TV+, HBO 맥스 등 한국 시장에 새로 뛰어든 글로벌 OTT는 물론 웨이브, 티빙, 왓챠, 쿠팡플레이 등 국내 OTT도 숨 고르기와 함께 시장 재편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2월 티빙이 KT 시즌을 흡수 합병한 바 있듯 OTT 플랫폼간의 합종연횡은 2023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와 함께 소비자의 분화에 발맞춰 기존의 거대 플랫폼과 다른, 작고 경쟁력 있는 플랫폼도 속속 등장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물론 아직은 “신규 플랫폼들이 기존 시장의 선두주자와 대등하게 경쟁할 만한 투자 규모나 의지가 충분히 올라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어느 쪽이건 OTT 플랫폼 경쟁은 양적인 측면에서 질적 경쟁으로 전환되었고 이에 걸맞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자본력이 중심이 되는 교통정리”가 될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예측 가운데 장기적으로는 이렇게 정리된 OTT와 극장이 상생하는 구조로 재편될 것으로 보인다.
글로컬라이제이션과 시즌, 시리즈화
모두가 K콘텐츠를 말한다. K콘텐츠는 이제 단발성 개별 히트작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이 되어버렸다. 역설적으로 “한국 시장은 이에 화답하여 꾸준한 작품을 공급해야 할 책임을 짊어진 것”이기도 하다. 2000년대 초반 내걸었던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슬로건과는 상황이 다르다. 바야흐로 전세계 미디어 시장의 흐름은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 다시 말해 로컬콘텐츠의 세계화 및 글로벌 기업의 현지화” 속에 놓여 있다. 지난 몇년간 글로벌 미디어 기업의 국내 현지화는 이미 안착되었고, “2023년은 국내 미디어/엔터 기업의 ‘현지화 전략’으로 글로벌 영향력 확대가 이슈”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실제로 음악, 영상, 스토리(웹툰, 웹소설) 엔터/미디어 비즈니스의 방향은 기존의 국내에서 만들어져 ‘수출’의 방식으로 진행되던 비즈니스가 북미 시장을 중심으로 글로벌 현지 안에서 직접 생산, 유통의 방식을 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미 미디어 대형 스튜디오들은 북미의 현지 제작사를 인수하여 직간접적 진출 및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2023년은 자체 제작 미드 방영 예정작을 10편 이상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제 글로벌화는 단순한 구호나 해외 시장 공략 차원이 아니다. 한국 시장에 세계 콘텐츠가 실시간으로 들어오고 한국 콘텐츠가 플랫폼을 통해 전세계 시장에 실시간 유통되는 무한 경쟁 체제에 가깝다. 지금은 K콘텐츠가 충분히 경쟁력이 확보되어 선도하는 입장이지만 이러한 유리한 고지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예단하기 힘들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에 따라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데, 초기에는 도전적인 시도로 물꼬를 텄다면 이제는 성공 사례를 바탕으로 안정화를 추구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범죄도시> 시리즈, <오징어 게임> 시즌2 등 성공작의 속편이 지속적으로 개발되는 것이 그 사례 중 하나다. “<오징어 게임>처럼 글로벌 시장에서도 충분히 버즈를 일으킬 수 있는 IP 개발이 포스트 코로나 후 장기전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이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로컬라이제이션은 시장 확대의 기회이자 양질의 콘텐츠의 지속성을 평가받는 시험대이기도 하다. 2023년은 “확장된 시장을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을지 검증된 모델을 찾는 시기”가 될 것이다.
극장의 생존과 공간의 변화
“단지 팬데믹과 OTT 플랫폼의 등장 때문만은 아니다.” 코로나 이후 불어닥친 극장산업의 위기에 대한 다양한 진단이 있지만 팬데믹과 OTT는 시곗바늘을 빨리 돌렸을 뿐 언젠가는 마주할 문제였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팬데믹이 오기 전까지 한국 영화산업은 10년 넘게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호황기와 함께 양적 성장을 이루었을 뿐 질적 성장을 통한 실질적인 경쟁력을 만들지 못한 채 작품들의 퀄리티는 지속적으로 하향 평준화되어 왔었다”는 것이다. 흐름은 단순 명료하다. “유동성의 위기로 개인 자산이 줄어들었고, 지출에 대해 신중해지고, 지난 2년간 훌륭한 대체재를 이미 만났기에 관객은 기존처럼(2019년 이전) 극장에 오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현재 극장산업은 규모를 유지하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문제들까지 속속 드러나는 중이다. 티켓 가격의 상승, 제작 편수 감소, 대작과 저예산 장르물로의 양극화 심화 등 2022년을 지나면서 여러 문제들이 돌출되었고 2023년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변화와 대응의 시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현재 극장산업이 마주한 문제가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극장 공간의 필요성을 환기하고 공간의 본질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의견도 나왔다. “왜 시간을 들여서 극장까지 가야 할까, 극장에서 무엇을 즐겨야 할까, 무엇을 누려야 할까에 대해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기준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는 것이다.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극장 관람만이 줄 수 있는 체험을 제공할 필요가 대두되었고, 자연스레 극장이라는 공간의 효용에 대한 고민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극장의 형태도 관객의 요구에 맞춰 다양하게 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극장에서 볼 만큼 확실한 소비 보상이 이루어지는 웰메이드/오락영화”와 극장의 본질을 환기시키는 예술영화들이 극장에 안착하고, 나머지 일반적인 콘텐츠는 플랫폼 위주로 진행될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어떤 방식이 되었건 당장의 변화로 이어지긴 쉽지 않아 보이고 이에 따라 2023년에는 “극장산업의 한계를 돌파하기보다 고유의 체험을 제공할 수 있는 상징적인 형태로 자리 잡는 시도”가 이어질 것이라는 예상이다.
대세는 IP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에서는 IP(지식재산권)를 교류하는 부산스토리마켓이 처음으로 열렸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플랫폼은 세계 시장을 실시간으로 연결하였지만 빛에는 그림자가 따르는 법이다. 가장 큰 문제는 글로벌 OTT의 콘텐츠 수급과 수익배분 방식이 로 리스크 로 리턴이라는 점이다. 콘텐츠를 구매한 뒤에 발생하는 수익에 대해서는 플랫폼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탓에 제작사들이 자칫 하청 구조로 들어갈 우려가 있다. 다행히 한국 콘텐츠들의 상황은 그리 부정적이지 않는데, 그 중심에 IP가 있다. “기본적으로 시나리오를 포함한 IP를 확보하고 있는 덕분에 흥행작의 속편이 제작될 때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업계는 양질의 IP 확보를 위한 무한 경쟁에 나선 상황이고 웹툰, 웹소설을 비롯한 원천 IP 시장이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는 중이다. “웹툰 웹소설쪽도 초창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양질의 작가군이 양성, 유입되고 있어서 영상화 콘텐츠의 좋은 밑바탕의 원작 역할을 주도적으로 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이러한 IP 확보 경쟁이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유명 작가의 작품은 1회가 나오자마자 구매를 한다든지, 너무 많은 비딩이 벌어져서 그 이야기의 사이즈에 맞는 예산이 아닌 원작 구매 비용으로 이미 제작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과다 경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구조적 문제들도 신중하게 제기된다. “웹툰, 웹소설을 중심으로 한 IP 확보는 단기적으로는 콘텐츠 업계를 산업적으로 성장시키는 힘이 되겠지만 오리지널 아이템들이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는 측면에서는 부정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IP의 편중이 심화될수록 역설적으로 다양성이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제작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는 있겠으나 장기적으로 보면 원천 IP업체 대비 기획 및 제작사의 경쟁력이나 영향력은 점점 더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는 관측도 나왔다. 순수한 기획/제작사의 경우 스스로 자생하거나 자체 기획으로 인정받기가 더 열악한 상황이 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IP의 확보가 현재 영상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크고 작은 문제에서 눈 돌리지 않고 보완책을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