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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포클레인 모는 무녀가 되고 싶어: 박혁지 감독과 수진 보살의 대화
김소미 2023-01-12

박혁지, 권수진(왼쪽부터).

첫 만남

박혁지 무녀의 운명이 내게는 너무도 뛰어난 능력이라고 느껴졌다. 타인의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놓고 고민하는 아이러니도 더 파고들고 싶었다. 무당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었고, 무속을 다루는 기존의 다큐멘터리를 답습하고 싶지도 않았다.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특출한 능력을 자기 삶에 적용해가는 과정의 이야기가 궁금해 수진을 찾아갔다.

권수진 방송에 연달아 출연하고 나니 하루에 300, 400명씩 손님이 찾아와 힘든 일이 많았다. 신기가 없다, 할머니가 손녀를 팔아 돈 번다고 욕하거나 어떤 사람은 자기 점을 봐주지 않으면 산장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해서 오랫동안 문을 닫기도 했다. 다시는 촬영은 안 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어느 날 머리가 희끗한 아저씨가 나타나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만 해라,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말했다. 어쩐지 그냥 한번 해보자 싶었다.

2년에서 7년으로

박혁지 2015년 촬영을 시작해, 추가 인서트 작업을 위해 2022년 2월에 촬영을 마쳤으니 도합 7년간 붙든 프로젝트였다. 원래는 2년 정도로 내다봤고, 처음부터 7년이 걸릴 거라고 말했다면 수진이는 절대 이 일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 같다. 촬영을 1년 정도 한 시점에 대학교 1학년 1학기 여름방학을 맞이한 수진이 그만하자고 폭탄 선언을 했다. 이럴 때 다큐멘터리는 정말이지 방법이 없다. 기다리는 수밖에. 한편으론 갓 대학 생활을 시작한 시점에 다큐멘터리 카메라와 동행하는 일이 여러모로 어떤 부담을 안겼을지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쉽게 순응했다.

권수진 학과 대표가 되었는데 주말엔 신당에 가야 하니 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어려움이 컸다. 감독님께 친구들과 친해질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되레 골이 패는 느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 정체성을 밝히는 일이 더더욱 쉽지 않았다. 나 스스로 알리기 전에 감독님이 학교에 찾아온 것을 계기로 알려지면 괜히 ‘쟤 귀신을 본대’ 하는 식으로 이상하게 알려질까 두려웠다. 만약 계획대로 대학교 1, 2학년 때까지만 촬영했다면 지금과는 꽤 다른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그때의 나는 더더욱 무언가 결정하지 못했을 것 같거든.

재회

권수진 20대 초반까지는 정말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콱 숨어버리고만 싶었다. 학교에선 편견과 싸우느라 맘처럼 쉽게 풀리는 일이 없었고, 신당에 소홀해져 할머니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도 힘들었다. 아무 욕심내지 말고 평일엔 학교, 주말에는 신당을 반복하며 그냥 빨리 이 생활을 끝내버리자고 다 내려놓고 나니 오히려 많은 것이 다시 하고 싶어졌다. 다큐멘터리를 마무리하고 싶다는 마음도 다시 생겼고.

마지막 손님의 마술

박혁지 <시간을 꿈꾸는 소녀>를 피칭하러 다닐 때 엔딩이 어떻게 나올지 염려하는 질문들이 많았다. 처음엔 과거의 수진과 미래의 수진이 서로에게 묻고 답하는 것 같은 약간의 연출을 가미한 형태를 구상했었다. 그런데 수진이 대학교 4학년쯤이던 주말 어느 날, 마침 내가 촬영하는 중이었는데 우연히 한 사람이 상담받는 모습을 찍을 수 있게 됐다. 영화에 거의 리얼타임으로 담겨 있다. 여러 고생을 하면서 무당이 되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을 대하는 수진의 표정과 태도가 유독 남다르더라. 내가 막연히 꿈꿨던 엔딩이 현실에서 이뤄진다는 느낌을 받았고 카메라 뒤편에서 혼자 전율했다. 손님이 나가고 혼자 생각에 빠진 수진의 얼굴도 롱테이크로 오래 담을 수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수진이 다음 손님을 향해 ‘들어오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역시 무척 좋았다.

권수진 하고 싶은 게 많고 꿈이 많아서 혼자와의 싸움을 한 거지 나는 불운한 편은 아니다. 할머니와 아빠가 있고 대학도 나왔고 어린 나이부터 돈도 벌었으니 내가 한 고생이라면 산속에 살면서 눈 밟고 비 맞은 것뿐이겠다. 그런데 신병이 생겨 몸 아프고 주변인에게 상처받고 가족까지 등지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런 분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용기를 주는 거다. 우선 스스로를 믿고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해서 살아야 한다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무당도 될 수 있다고. 영화 속 그 장면에서는 손님이 나간 뒤 ‘왜 우리 같은 운명이 있는 걸까, 신의 존재가 무엇이길래 인생에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 걸까’ 하는 생각에 빠졌었다.

여전히, 시간을 꿈꾸는 소녀

박혁지 제목은 말 그대로 두 가지 의미로 지었다. 다가올 시간에 대해 꿈을 꾸는 소녀, 그러니까 다음날 오는 첫 손님의 꿈을 꿀 정도로 예지몽이 뛰어난 사람을 가리킴과 동시에 자신의 여러 가능성을 꿈꾸는 청년의 마음을 담고 싶었다. 감독인 나로서는 현재 마음을 다잡아 신당을 모시고 자기 일에 열심인 수진이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한다. 살아갈 인생이 앞으로 길지 않나. 기차 안에서 자는 모습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데 수진이 계속 꿈꾼다는 뉘앙스를 주고 싶었다. 혹은 앞서 수진이 거쳐온 힘든 시간들이 모두 그가 기차 안에서 꾼 낮잠의 내용처럼 느껴져도 좋을 것 같다. 아직 이 청년의 인생에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편견을 깨는 무당

권수진 점을 볼 때 늘 어린아이로 머무르려고 한다. 내가 보이는 만큼만 말하고 모르는 것은 입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계속 순수한 상태로 나와 남의 인생을 대할 것이다. 무당은 신을 통해 사람과 소통하는 사람이지 신이 아니니까. <시간을 꿈꾸는 소녀>에 참여하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우선은 무업을 더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다. 얼마 전 무형문화재인 서울 새남굿전수자가 된 것도 스스로 무업을 체계적으로 배워 부끄럽지 않기 위함이었다. 미디어에 무당의 왜곡된 이미지가 많고, 또 실제로도 요즘엔 지나치게 상업화된 면들이 있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이 일의 편견을 순화하는 데 기여하면 좋겠다. 그외에도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다. 무속 신앙의 전통에선 “아이를 낳으면 100일간 신당 문을 열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무녀의 결혼과 육아를 금기시한다. 현대에도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좋은 사람을 만나서 사랑하고 싶고 결혼도 하고 싶다. 중장비 기사 자격증, 버스 운전면허를 따서 큰 포클레인 모는 무녀가 되는 것도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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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영화사 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