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 오른 외교관 재호(황정민)의 표정에 초조함이 어린다. 창밖과 손목시계에 번갈아 시선을 던지는 그의 목적은 단 하나. 탈레반이 고지한 살해 시한 안에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자국민들을 구출하는 것이다. 임순례 감독의 신작 <교섭>은 재호가 현지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국정원 요원 대식(현빈)과 만나 인질들을 살리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그린다. 대식이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반면 재호는 외교관으로서 지켜야 할 원칙을 흔들림 없이 고수한다. “황정민 배우의 새로운 이미지 변화”라는 임순례 감독의 말처럼, 그의 최근작인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암살자 인남, <헌트>의 귀순한 파일럿 리 중좌, 드라마 <수리남>의 목사 전요환과 다르게 <교섭>의 재호는 자신의 "용광로 같은 에너지"를 보다 잘 정제해 드러내는 인물이다. 의상의 디테일까지 손수 챙기는 것으로 잘 알려진 배우답게 <씨네21>의 커버 현장에서도 세세하게 의견을 나눴다. 택한 의상에 관해선 담당 사진기자와 직접 소통하고, 인터뷰하는 와중에도 질문의 의도를 명확히 짚어가며 답변했다. 작품 속의 행동, 대사, 분위기 하나 허투루 만들어낸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한 순간이었다.

-영화 <크로스>가 지난해 11월에 크랭크업하고 12월에 곧바로 <베테랑2> 촬영을 시작했다. 한달도 채 쉬지 못하고 새 작품에 들어간 셈인데 힘들진 않나.

=뭘, 선수인데. (웃음) 쉰다고 연기를 더 잘하게 되는 건 아니잖나. 하던 대로 하는 거지.

-류승완 감독을 포함해 <베테랑>의 기존 멤버들과 재회해 굉장히 반가웠겠다.

=그렇다. <베테랑>이 개봉한 지가 거의 10년이 됐더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 사람들은 똑같다. 불과 얼마 전에 <베테랑>을 찍은 것처럼 편했다. 관객도 ‘<베테랑> 본 지 얼마 안됐는데 <베테랑2>를 금방 보네, 다들 변함없네’라는 느낌을 받았으면 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이어 21년 만에 임순례 감독과 재회했다. 감독님이 뭐라며 작품을 제안하시던가.

=특별히 별 말씀을 하시진 않았다. 원체 말이 많은 분이 아니다. <교섭>의 각본이 내게 왔고 임순례 감독님이 연출하신다는 말을 들었고, 그 순간 바로 하겠다고 했다. 별로인 시나리오를 주실 리도 없지만 혹여 별로였어도 당연히 했어야 했다. 내겐 시나리오가 아니라 감독님과 작업하는 게 중요했으니까. 언젠가 함께 작업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늘 있었는데 마침내 그 기회가 찾아온 거니까.

-시나리오는 어떻게 봤나. 평소 시나리오 분석을 꼼꼼히 하는 스타일이라고 알고 있다.

=일단 재밌게 잘 읽혔다. 재호가 피랍된 인질들을 구해야 한다는 목표에 각을 세우고 몰입해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봤다. 이를테면 후반부의 협상 신을 향해 달려간다는 느낌으로, <교섭> 작업의 시작과 끝은 그 신이라고 생각하며 준비했다.

-국정원 요원인 대식이 아니라 재호를 맡은 것이 의외란 반응들이 있었다.

=나도 감독님께 “내가 대식이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물었었다. 그렇다면 내가 정재호를 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텐데 그게 뭘까 스스로 고민이 많았다. 정재호라는 인물의 성격과 성품에 관해서도 감독님과 많은 얘기를 나눴고. 결론적으로 나는 재호가 외교관이기 때문에 인텔리한 느낌을 줘야 한다는 것엔 별 관심이 없었다. 국가에 흠집을 내지 않는 선에서 재호가 어떻게 최선을 다할 수 있는지에 집중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준비할 때 맡은 캐릭터와 같은 직업의 인물들을 만나는 편이지 않나. 이번엔 녹록지 않았겠다.

=워낙 기밀이기도 하고 외교관들을 만나기도 여의치 않아 감독님과 얘기를 많이 나눴다. 감독님이 해주신 말들과 탈레반,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영상과 자료를 주로 참고했다.

-재호는 양복을 교복처럼 입는 인물이다. 극 초반엔 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넥타이를 단단히 맸다가 갈수록 조금씩 풀어지는 걸 보며 현실을 제대로 반영했다고 느꼈다.

=제작진은 날짜가 바뀌니까 갈아입을 의상을 더 준비하자고 했는데 나는 반대 의견을 냈다. 짧은 시간 안에 사람들을 구해내야 하는데 거기서 옷 갈아입을 정신이 있을까. 없다고 봤다. 그래서 옷을 많이 갈아입지 않는 선에서 디테일을 조율했다. 방금 말한 넥타이에 관련된 것도 다 계산된 결과다. 재호는 아프가니스탄 공항에 내릴 때 입은 정장을 마지막 협상 때 그대로 입고 간다. 현실적으로 옷을 세탁하거나 다림질할 여유도 없을 거고, 그러니 처음 입고 온 옷을 잘 보관해뒀다가 다시 입고 간다는 설정이었다.

-2020년 7월부터 두달간 요르단에서 촬영했다. 전세계가 문을 걸어 잠그던 당시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요르단 입국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운이 따라준 것이 아닌가.

=그때 K방역이 화제가 돼 좋게 작용했고 <사랑의 불시착>의 현빈 때문에 받아준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일동 폭소) 아니, 그때 <사랑의 불시착>이 중동에서도 인기가 많았거든. 요르단에 도착했을 때 텅 빈 공항에 우리밖에 없었던 게 기억난다. 그 어려운 시기에 현지에 갔다는 것만으로 우리 스탭과 배우들은 큰 산을 넘었다고 느꼈다.

-현지의 배우, 스탭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부분이 있었나.

=요르단은 중동인데 아프가니스탄은 중앙아시아라 언어가 다르다. 그래서 요르단의 현지 배우들도 아프가니스탄의 언어를 새로 배워야 했다. 다행히 미국에 있는 아프가니스탄 국적의 배우들을 직접 섭외할 수 있었다. 현지 연출팀이 한국 스탭들을 보고 무척 놀라워했다. 다들 열정적이고, 또 한국인의 성격이 급하지 않나. 신기해하면서도 힘들어했다. 우리가 “이런 신이 있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라고 작품에 관한 의견을 물을 땐 당황해하기도 했다. 아마 스탭으로서 어레인지해주는 정도만 예상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중엔 한팀으로 같이 작품을 만들어간다는 생각에 굉장히 좋아했다. 그 순간들의 느낌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