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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아바타: 물의 길’의 스토리에 대하여

퇴행적 이분법의 서사

필자 소개

손희정 영화평론가. <을들의 당나귀 귀2>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 등을 썼다.

2009년 당시 <아바타>의 등장은 꽤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북반구 선진국(Global North)의 남반구(Global South)에 대한 착취를 성실하게 반성하는 작업이자 발을 들이는 곳마다 모든 걸 파괴하고 마는 초국적 자본에 대한 생태주의 비판으로서, 무엇보다 기꺼이 타자-되기를 선택하는 탈휴머니즘적 철학의 대중적 재현으로, 영화는 진지한 사유와 토론을 촉발했다.

물론 의심스럽기도 했다. 영화는 다른 한편으로 하반신 마비를 자신의 한계라고 생각하는 퇴역군인 제이크 설리(샘 워딩턴)가 그 ‘망가진 신체’를 버리고 자신의 기억을 그대로 보존한 채 전설적인 영웅 ‘토르크 막토’로 거듭나는 트랜스휴먼 서사였던 것이다. 게다가 이는 지구에서 손상된 남성성을 회복하는 과정이기도 했는데, 제이크는 ‘남자가 되는’ 통과의례를 완수한 후에야 비로소 ‘나비의 아들’(son of omatikaya)로 승인받는다.

<아바타>는 기술적으로뿐만 아니라 서사적으로도 여러 레이어를 쌓아놓은 작품이었고, 따라서 해석의 묘를 발휘할 수 있는 텍스트였다. 그러나 13년 후 다시 찾아온 <아바타: 물의 길>은 어떤 해석의 시도도 무색하게 만들어버린다. 전작이 가지고 있었던 섬세한 면모들이 사라진 자리에 오로지 “아버지는 (전쟁으로) 가족을 지킨다. 그것이 존재 이유다”라는 군사주의적 가부장제 밈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아바타: 물의 길>은 <아바타>의 수준 떨어지는 변주에 불과하다. 각종 화려한 잔재주들을 거둬내고 보면 <아바타> 역시 아버지를 배신하고 자신의 길을 떠나는 탕자의 서사였다. 제이크는 ‘나쁜 공적 아버지’인 마일즈 쿼리치(스티븐 랭)를 배신하고 토르크 막토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아바타: 물의 길>이 순종적인 아들 네타이엠이 아닌 반항하는 아들 로아크를 제이크의 후계자로 선택하는 건 일종의 운명론이다. 로아크가 2022년 물의 부족 ‘멧케이나’의 땅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은 제이크가 이미 2009년 숲의 부족 ‘오마티카야’의 땅에서 겪은 일이다. 부족장의 딸과 사랑에 빠지는 것까지도 말이다.

영화는 침략과 약탈로 이루어진 세계사의 구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했던 전작과 달리 사적 복수극으로 그 시야각을 극적으로 축소시키면서 본격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파고든다. 한쪽에서 제이크의 아들들이 ‘어떻게 하면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것인가’를 고심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인간의 몸에 나비의 영혼을 지닌 스파이더와 나비의 몸에 인간의 영혼을 담은 마일즈 쿼리치의 혈육 찾기가 진행된다. 스파이더의 과제는 ‘어떻게 하면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 것인가’이지만, 그렇다고 친부의 정체성을 가진 아바타를 외면할 수는 없다.

강력한 ‘피의 끌림’은 <아바타: 물의 길>을 지배하고 있는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맞닿아 있다. 영화는 생명을 여자와 남자로 나누고, 이 두개의 성별에는 각자 정해진 자리가 있다는 성별이분법이 자연이자 본질이라고 단언한다. 돌이켜보면 제이크가 나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판도라가 북반구 문명과 이런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었던 덕분이다. 만약 제이크에게 다른 성별 되기가 요구되었다면, 그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을까? 결국 해병대의 정신을 장착한 제이크에게 나비가 된다는 건 타자-되기가 아니라 초인간 비행병기로의 진화이자 아버지가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을 뿐이다.

어머니의 세계와 사물인터넷, 그리고 아바타의 종차별주의

이 강고한 이분법과 이에 기반한 강제적 이성애는 남반구 원주민에 대한 대상화를 서사적 근거로 이용한다. 나비는 관객에게 ‘아주 오래된 미래’로 다가온다. 인간보다 자애롭고 용맹하며 지혜로운 우주종으로 그려지는 가운데 아메리카 원주민 혹은 아프리카 원주민의 모습을 원형으로 하는 ‘설정된 원본이 있는 모사’인 까닭이다. 영화는 북반구를 과학과 역사의 자리에, 남반구를 자연과 탈역사의 자리에 놓는 진부한 이미지 정치를 통해 나비가 실천하는 가부장제가 생명의 본능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나비의 가부장제적 공동체는 황폐해진 지구로 상징되는 북반구 문명이 추구해야 할 미래임과 동시에 회복해야만 하는 노스탤지어가 된다.

이런 경향은 <아바타: 물의 길>에서 더 강해졌고, 전사이자 스승이며 무당이었던 네이티리(조에 살다나)의 역할은 전통적인 현모양처에게 허락된 보조석에 안온하게 닻을 내린다. 그리고 네이티리를 따라 ‘여자’로 성장하고 있는 아이들도 딸의 자리에 묶인 채로 버둥거린다. 딸들의 능력은 키리(시고니 위버)에게서 최대치로 구현되는데, 그건 판도라를 보살피는 ‘대자연 어머니’ 에이와와 교감하는 능력이다. 이는 위대한 권능이지만, 마찬가지로 아주 오랫동안 여성에게 할당되어온 성역할임을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아바타>와 달리 <아바타: 물의 길>의 에이와는 신이자 자연 그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거대한 네트워크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나비인도, 아바타도, 그리고 키리까지도 판도라를 사물인터넷처럼 사용하기 때문이다. 나비의 신체를 가진 이들은 네크워트에 접속해서 시그널을 보내는 경로를 파악하기만 한다면 자신의 필요에 따라 판도라를 조종할 수 있다. 나비의 전사가 판도라의 비행생명체 이크란이나 수중생물인 추락과 ‘샤헤일루’(교감)한다고 말하는 건 허울 좋은 명분이고 샤헤일루는 ‘길들여서 통제하는 것’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그렇게 본다면 아바타의 생태주의란 자연에 대한 ‘애완’(愛玩)일 뿐이다. 이는 영화에 등장하는 종차별주의를 잘 설명해준다. 흥미롭게도 <아바타: 물의 길>은 나비인의 죽음을 상상할 때는 매우 조심스러우면서도 이크란이나 추락의 죽음은 한없이 가볍게 다룬다. 영화가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사회를 형성하는 툴쿤을 사람(people)으로 여기는 것은 주목할 만하지만 이 역시 언어, 이성, 가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 등 지극히 인간(human)적인 기준을 ‘사람의 조건’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종차별적이다.

북반구인들의 악취미

<아바타: 물의 길>에 이르러 전작인 <아바타>까지도 비장애인 중심의 군사주의를 진부한 남성 영웅 서사에 버무려놓은 퇴행적인 작품으로 확정되어버렸다. 여기에는 남성과 여성을 나누는 성별이분법뿐 아니라, 북반구/남반구, 과학/자연, 육체/정신, 물질/비물질 등의 각종 이분법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이분법 안에서 인간의 정신이 아바타의 신체를 정확하게 조종할 수 있다는 주체성에 대한 환상은 작가/감독이 모든 이미지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도착적인 제어 욕망과 겹친다.

그리고 이 제어 욕망은 아무래도 기이하다. 북반구 문명이 정복해서 죽여버린 것, 소멸시켜버린 것을 또다시 엄청난 전기와 테크놀로지를 들여서 가상 화면으로 되살려놓은 뒤 극장에서 즐긴다는 걸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게다가 이 문명은 바다 속 생명 역시 끊임없이 멸종시키고 있다. 그렇게 죽인 생명을 스크린에 띄워놓고 ‘정말로 진짜 같지?’라고 과시하다니, 비싸디비싼 악취미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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