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웃어볼까요, 는 내가 일을 시작한 뒤로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다. 주로 인터뷰를 하러 갔을 때 사진기자나 포토그래퍼가 하는 말로, 저 뒤에 이어지는 말로는 계속 웃어볼게요, 조금만 더 웃어볼게요, 자연스럽게 웃어볼게요 등이 있다. 처음 몇년은 물색없이 웃다가 언젠가부터는 웃는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미리 말씀드린다. 그래도 지면에 사진을 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왕이면 웃는 사진이 좋기 때문에 매번 같은 주문을 받게 된다. 그런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도 아니고, 지면으로 나를 처음 만날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나쁠 것 없으니 여전히 웃는다.
웃음에는 죄가 없다. 문제는 웃는 사람을 우습게 보는 시선이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데 가끔 그 복을 뚫고 예의 없는 사람들이 시비를 걸거나, 본인도 모르게 사람을 쉽게 본다. 젊은 여자의 경우 이런 난처함은 배가된다. 젊은 여자가 웃으면 이성적 호감이 있는 줄 안다. 젊은 여자가 웃으면 전문성보다는 인간성을 본다. 워낙 누구에게나 잘 웃는 편인데, 긴 머리가 치렁했던 내가 웃으면 나는 책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라 ‘아리따운 처자’로 인식되었다. 강연자로 초대되어 강연을 가서 “아유, 웃는 것도 너무 예쁘고 시집 가면 너무 좋겠네~” 같은 소리를 들으면 웃음이 넘치던 나라도 더이상 웃고 싶지 않게 된다.
하나의 이미지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되는 사진에서 이런 효과를 피해갈 수는 없으리라. 나는 카메라 앞에서 광대뼈가 아프도록 웃으면서 생각한다. 나이 든 남자에게도 인터뷰 사진을 찍으며 이렇게 웃으라고 요구하던가?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전문성을 강조하지 않던가? 최근 가장 편안하게 사진을 찍은 촬영장은 아무런 표정도 요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서 있을 것을 요구한 촬영장이었고, 해당 잡지는 자신의 세계를 개척해나가는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특집호의 인물 중 하나로 나를 초대한 것이었다. 이것이 우연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더이상 인터뷰 사진에서 웃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는 사진기자가 요구하면 자연스럽게 웃었고, 그러기 위해 내가 농담을 해가며 웃었지만, 이제는 적극적으로 항변할 생각이다. 웃는 얼굴이 훨씬 예쁘다는 걸 나도 알고 그래서 다들 웃는 얼굴을 요구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인터뷰에서 ‘예쁘게’ 보이고 싶지 않다. 내가 가진 진중함, 꾸준함, 전문성이 보이기를 원한다. 나이와 성별이 짐작되지 않는 문체의 글을 쓴다는 사실이 보이기를 원한다. 전에 없던 영역을 개척했고 시장을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 보이기를 원한다. 그것을 웃음으로 달성할 수 있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웃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면, 그럴 수 있을 때까지는 웃음을 보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