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초 개봉한, 동독 패션계를 그린 영화 <이제는 없는 나라에서>(In einem Land, das es nicht mehr gibt)가 화제다. 감독인 엘룬 괴테의 자전적 이야기를 소재로 해서 특히 주목받았다. 1966년생인 엘룬 괴테 감독은 동독에서 길거리 캐스팅돼 동독 유일의 패션 잡지의 모델로 일한 경력이 있다. 영화 속 배경은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몇달 전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앞둔 18살의 수지는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어느 날 수지는 가방 안에 금서였던 <1984>를 넣고, 당시 유행이지만 금지되었던 평화 상징 문양을 재킷 소매에 꿰매 다니다가 경찰에 적발된다. 대학 진학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수지는 강제 취직된 공장에서 고된 일상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에 우연히 한 사진작가의 카메라에 잡히면서 수지의 운명은 극적으로 바뀐다. 이 우연을 통해 동독의 유일한 패션 매거진이었던 <지뷜레>의 패션 모델로 발탁된 수지는 당시 동독에서 ‘마네킹’으로 불렸던 패션 모델로 활동하며 디자이너, 모델, 사진작가 등 패션계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유롭고 기이한 세계를 경험한다. 영화는 획일화된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숨 쉴 구멍이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준다. 자유로운 영혼들이 모인 커뮤니티의 모습은 서유럽의 여느 예술가 집단과 다를 바 없이 자유분방하고 동독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획기적이다.
영화는 당시 패션계의 실상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검증된 실상은 꽤 놀랍다. 장벽 붕괴 직전 동독 패션계는 공산주의 국가의 획일적이고 권위적이었던 문화와 사뭇 달랐다. 괴테 감독은 “장벽 붕괴 직전 동독 일각에서 일었던 자유와 저항의 분위기를 그려내고 싶었다. 지금까지 희생자와 가해자의 구도로 그렸던 동독 시대상 영화의 틀을 벗어나 동독 사회에서도 아름다운 세계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동독이 붕괴되기 직전 동독 주민들이 숨 쉴 수 있는 구멍, 즉 해방구들이 도처에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 틈새가 패션계였다. 불평등, 불의로 억압당하는 답답한 현실에서 자유를 희구하던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영화 속 대사가 의미심장하다. “네가 진정 자유롭다면 어디서나 자유로울 것이고, 자유롭지 못하다면 서독에 가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바깥이 아니라 각자의 내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영화는 대사뿐 아니라 여러 장치를 통해 암시한다. 동독 패션계의 이야기는 결국 자유에 대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