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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꿈과 모험의 깃발을 올려라: 극장판의 재미를 최대로 끌어올린 ‘원피스 필름 레드’
송경원 2022-11-23

© Eiichiro Oda/2022 "One Piece" production committee

“내 보물 말인가? 원한다면 주마. 어디 찾아봐라! 이 세상의 전부를 그곳에 두고 왔으니!” 처형을 앞둔 해적왕의 유언으로 막을 연 대해적 시대도 어느덧 25년이 넘었다. <드래곤볼> <슬램덩크> <포켓몬스터> <나루토> 등 일본 만화계의 전설로 불릴 만한 작품들은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지만 현재 진행형의 전설을 꼽는다면 그 제일 앞자리는 단연 <원피스>의 몫이다. 1997년 <주간 소년 점프>에서 연재를 개시한 <원피스>는 단행본 102권을 돌파했고 누적 발행부수 4억9천만부(2021년 기준)를 넘어섰다. 1999년부터 시작한 TV애니메이션 역시 1000화(2021년 11월 기준)가 넘게 제작되어 전세계의 사랑을 받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당연히 극장판 애니메이션도 14편이나 나왔는데 <원피스> 극장판은 팬들을 위한 떠들썩한 축제에 가깝다. 간혹 본편의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거나 정사로 자리 잡기도 하지만 대체로 특별 에피소드에 가까운 내용으로 한바탕 떠들썩한 소동을 벌이고 그간 주요 스토리로 다루지 못했던 캐릭터가 무대 전면에서 맹활약을 펼치기도 한다.

© Eiichiro Oda/2022 "One Piece" production committee

주인공이 아닌 적이 중심이 되는 극장판

15기 극장판 <원피스 필름 레드>는 13기 <원피스 필름 골드>(2016) 이후 오랜만에 원작자 오다 에이치로가 25주년을 기념하며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작품이다. 만화 <원피스>가 와노쿠니 에피소드(와노쿠니 섬을 무대로 펼쳐지는 내용-편집자)를 끝내고 드디어 최종장으로 접어드는 기색이 보이는 지금, 극장판의 축제도 절정에 달아올랐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원피스 필름 레드>는 개봉 2주 만에 역대 <원피스> 극장판 시리즈 중 최고 흥행을 기록하며 역대 일본영화 흥행수입 9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원피스>가 장기 연재로 인해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던 상황에서, 이를 단번에 불식시키며 전성기의 위엄을 갱신하고 있는 셈이다. 10기 <원피스 필름 스트롱월드>, 12기 <원피스 필름 Z>, 13기 <원피스 필름 골드>에 이은 ‘필름 시리즈’ 4탄에 해당하는 <원피스 필름 레드>에서는 그동안 아껴두었던 비장의 무기, 빨간 머리 샹크스가 활약하며 팬들을 한껏 만족시키는 중이다. ‘필름 시리즈’는 원작자 오다 에이치로가 직접 참여하여 스토리라인과 설정을 정리하고 있는 시리즈인데, 해적을 동경했던 소년 루피에게 밀짚모자를 물려준 대해적 빨간 머리 샹크스의 등장은 <원피스>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신호라고 봐도 무방하다.

‘원피스’를 찾기 위한 대해적의 시대가 열렸지만 모든 사람이 모험의 시대를 반기는 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해적들의 횡포로 신음하고 있고 해적과 해군의 치열한 전투는 세계 곳곳에 아픔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젠가부터 폭력에 시달린 사람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하는 노래가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을 직접 만나지 않고 오직 노래만으로 세계에 평화와 위안을 전하는 가수 우타(목소리 출연-노래 아도, 연기 나즈카 가오리)는 어느새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가수로 거듭난다. 그런 우타가 대중 앞에서 첫 번째 라이브 공연을 하기로 했다는 소식에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라이브 공연장인 노래의 섬 엘레지아에 밀짚모자 해적단 루피(다나카 마유미) 일행도 함께한다. 사람들의 환호 속에 공연이 절정으로 달아오를 즈음 우타를 납치하려는 악당들이 나타나고 루피가 이를 물리친다. 그 와중에 루피와 우타가 어린 시절 친구였던 사실이 드러난다. 우타는 전세계의 바다를 주름잡는 대해적이자 최강자 사황 중 한 사람인 빨간 머리 샹크스의 딸이었던 것. 다들 충격에 빠진 것도 잠시. 우타의 노래는 신비한 힘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한편 샹크스의 이상한 움직임을 눈치챈 해군은 우타의 공연에 모종의 음모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며 코비와 헤르메포를 보내 정보 탐색을 시도한다.

<원피스> 극장판의 중심은 루피가 아니라 적에 있다. 밀짚모자 루피 일행은 ‘원피스를 향해 모험을 한다’는 흔들리지 않는 목적지가 있기에 어떤 시련이 와도 꺾이지 않는다. 특히 소년 만화 주인공 루피는 굴하지 않는 마음 그 자체다. <원피스>에서 해적은 꿈을 믿고 도전하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로 나뉜다. 꿈을 버리고 현실에 안주한 자들은 손쉽게 폭력에 기대고 타인을 괴롭히지만 ‘진짜’ 해적이라고 부를 만한 이들은 각자의 꿈을 걸고 미지의 바다에 뛰어든다. 원작 만화의 하늘섬 에피소드에서 루피와 조우한 검은 수염은 외친다. “사람의 꿈은 끝나지 않아!” 지금은 최대의 적이 된 검은 수염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루피와 동류의 사람이라고 봐도 좋다. 그렇기에 극장판에 등장하는 루피는 강철 같은 의지로 직진하는, 변화가 없는 인물이다. 대신 극장판의 서사와 감정선, 인물의 변화와 고뇌를 짊어지는 건 대부분 적들이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극장판들은 어떤 적이 어떤 이유로 세계에 싸움을 거는지에 관한 이야기라 봐도 무방하다. <원피스 필름 레드>에 등장한 우타는 세계 최고의 인기 가수인 동시에 미워할 수 없는 적이 되어 루피의 앞을 가로막는다. ‘필름 시리즈’의 적들은 모두 남다른 사연을 지닌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원피스> 10주년 기념작이었던 <원피스 필름 스트롱월드>의 금사자 시키는 세계관 최강자 중 한 사람으로 해군과의 정면 대결, 그리고 정복이라는 테마에 걸맞은 강적이었다. <원피스 필름 Z>의 적 제트는 전 해군 대장으로 상처를 가슴에 품은 채 모순된 세계를 바꾸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극장판의 주인공은 루피나 밀짚모자 해적단이 아닌 적이라 해도 무방하다. <원피스 필름 레드> 역시 우타가 왜 루피와 대립하는지, 빨간 머리 샹크스는 우타의 행보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이번 극장판의 최대 관전 포인트인 셈이다.

한바탕 떠들썩한 축제인 줄만 알았던 영화는 새삼스럽지만 그래서 더 필요한 질문을 던진다. 해적은 세계에 어떤 존재인가. 그저 힘과 폭력을 앞세워 민간인을 괴롭히는 무리인가, 아니면 강요된 질서를 거부하고 꿈에 도전하는 모험자들인가. 노래로 사람들을 위로하는 세계 최고의 가수 우타는 어떤 세계를 꿈꾸는가. 궁극적으로 꿈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꿈과 모험이라는 테마에 집중하는 이번 극장판은 <원피스>의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모험의 깃발을 들어 올린다.

© Eiichiro Oda/2022 "One Piece" production committee

기존의 팬과 새로운 관객 모두를 만족시키다

“영화 만들고 있어~! ‘레드’! 영화에서 전설의 할배들 그리는 거 이제 지쳤어! 여자 좀 그리게 해줘! 지금 우리가 만들고 싶은 캐릭터는 이 녀석이야!”라는 시작. “그리고 지금은 ‘원 피스’(ONE PIECE)와 정반대에 있지 않나라고 생각되는 다니구치 고로 대감독이 사실 루피를 이 세상 최초로 애니메이션화해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나요? 자, 속보에서는 깜짝 놀랄 만한 것이 많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신작 ‘레드’! 많은 상상과 기대 부탁드려요!” 오다 에이치로 작가는 <원피스 필름 레드> 제작에 앞서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유쾌하게 신작 소개를 했다. 솔직한 작가의 고백처럼 <원피스 필름 레드>는 기존의 극장판들과 다르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우타는 ‘세계 최고의 가수’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보는 것만으로 반할 만한 매력으로 가득하다. 우타의 콘서트가 주요 무대가 되는 만큼 극의 절반 이상을 떠받치고 있는 건 우타가 부르는 다양한 노래들이다. 우타이테(창작 사이트를 중심으로 곡을 커버하여 부르는 보컬리스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가수 아도가 노래를 맡아 7곡의 오리지널 노래를 부르는데 노래마다 각기 다른 개성과 메시지를 전하고 있어 그야말로 인기 가수의 콘서트를 관람하는 것 같은 즐거움을 안긴다.

<원피스 필름 레드>는 여러모로 새롭다. 단지 강력한 힘을 지닌, 골D. 로저와 관련된 구세대 인물들 대신 루피와 동년배의 젊은 여자 캐릭터가 적으로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도에이 애니메이션 내부에서 연출을 맡는 대신 1998년 특별판 0기 극장판 <원피스: 쓰러뜨려라! 해적 간자크>를 그린 다니구치 고로가 감독으로 합류한 것만 봐도 이번 작품에 실린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원피스 필름 레드>는 기존의 <원피스> 팬들이 만끽할 만한 또 한번의 떠들썩한 축제인 동시에 이제껏 <원피스>를 접해본 적 없는 관객이 이 시리즈에 입문하기에도 무리가 없는 작품이다. 단독 작품으로서 오리지널리티와 완결성이 충분하고 우타를 중심으로 한 단단한 서사와 숨겨진 사연, 캐릭터의 성장까지 골고루 갖추고 있다. 동시에 팬들을 즐겁게 할 요소들도 다양하게 준비했다. 일단 베일에 싸인 빨간 머리 해적단의 전투 장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원피스> 팬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거기에 마치 팬들을 위한 선물처럼 이제껏 선보였던 캐릭터들을 깨알같이 등장시키는 센스도 돋보인다. 서사적으로 사연을 부여할 틈은 없더라도 밀짚모자 해적단 멤버 한명 한명의 전투 장면을 정성스럽게 디자인하며 <원피스>를 사랑해온 팬들을 만족시킨다. 어떤 캐릭터가 어느 장면에서 어떤 방식으로 등장하는지 찾아보는 재미는 이 작품을 여러 번 관람해야 할 이유로 충분하다.

© Eiichiro Oda/2022 "One Piece" production committee

끝날지언정 잊히지 않는 모험

25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영원할 것만 같던 루피의 모험도 이제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이 시점에 나온 <원피스 필름 레드>는 <원피스>가 왜 현재 진행형의 전설인지를 증명한다. 기존 팬들을 만족시키고 젊은 관객을 다시 끌어모을 비장의 한수라고 해도 좋겠다. <드래곤볼> <포켓몬스터>, 최근 화제를 모은 <귀멸의 칼날>이나 <주술회전> 등과 비교했을 때 <원피스>, 그중에서도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경우 다소 확장성이 부족하고 일본 내수용에 가깝다는 오해를 받아왔다. 연재가 오래 이어진 만큼 언젠가부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모험에 지쳐 중도에 하차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그런 우려와 정체를 불식시키기 충분할 정도의 활기와 열정으로 가득하다. <원피스> 145화에서 닥터 히루루크는 묻는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심장이 총알에 뚫렸을 때?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맹독 버섯수프를 마셨을 때? 아니, 사람들에게 잊힐 때다.” 25년이 지난 지금, <원피스>는 다시 묻는다. 당신은 언제 모험을 꿈꾸어 보았느냐고. 소년 만화에서 영원히 이어질 질문.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번 극장판 <원피스 필름 레드>처럼 우리를 두근거리게 할 작품들이 계속 이어지는 한 그렇게 꿈과 모험을 향한 마음은 매번 새롭게 태어나 영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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