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니발과 페스티벌은 대학 시절 혼용돼 쓰였던 단어들이다. 차이는 잘 몰랐다. ‘카니발리즘’은 서로 모여서 사람의 살을 나눠 먹던 고대의 사건, 일종의 인육 행사에 기원을 둔다는 걸 배울 때, 충격적이었다.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에는 아들들이 모여서 자신들이 죽인 아버지의 살을 나눠 먹는 장면이 나온다. 친부 살인과 식육이라는 행사가 국가 기원과 관련되어 있다는 프로이트의 설명은 나에게는 문화 충격이었다. 카니발이 아버지 등 국가의 권위와 관련되어 있다면, 페스티벌은 신과 관련되어 있다. ‘허용된 과잉’이라는 페스티벌의 다른 정의는, 기존의 질서를 일시 정지하고 새로운 신의 질서를 만드는 기존 질서 파괴의 과정을 잘 보여준다. 전두환 시절 군사정권이 여의도에서 개최한 국가적 행사인 ‘국풍81’은 전형적인 페스티벌이다. 일종의 관제 페스티벌인데, 그것이 진짜 페스티벌이 된 이유는 행사 이후 많은 청소년들이 광장에서 음주와 함께 나름 자신들의 질서 파괴 행사를 벌였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축제나 행사들을 이렇게 두개로 나누면 어느 정도는 그 흐름을 분류할 수 있다. 이명박 시절의 촛불 집회나 박근혜 하야를 이끌어낸 촛불 행사는 카니발 계열의 행사다. 기존 권위를 부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고, 지배와 피지배자 사이의 대결 구도가 생겨난다. 매우 정치적이다. 페스티벌은 일시적으로 질서가 정지한 순간을 의미하며, 그 무질서를 즐기기 위해 사람들이 참여한다. 이제 젊은 사람들은 참여하지 않는 설과 추석은 조상신을 핑계로 ‘음복’ 술을 마시고 노는 종교적 유희의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청년들에게 차례가 갖는 종교적이고 영적인 의미는 사라졌다. 그저 온 국민이 참여하는 거대한 관제 행사 같은 것에 불과하다. 여성들에게 밥하라고 그러고, 남자들은 그걸 먹는 행사, 그리고 취직했냐, 결혼했냐, 어른들이 프라이버시 안으로 훅 들어오는 그런 행사는 이제 ‘기피재’가 되었다.
핼러윈은 전형적인 페스티벌 계열의 행사다. 지역 축제는 정말 영혼 없는 관제 행사이고, 전통 명절도 남은 게 없는 한국에서 ‘과잉’이 허용된 원래 의미의 페스티벌은 한국에서는 핼러윈밖에는 없다. 얼굴을 가리고 정체를 바꾸면서 일시적으로 우리는 무질서를 체험하고, 개개인은 일시적 재창조 과정을 겪는다. 같은 동양 문화권인 일본 역시 우리와 비슷한 전통 축제와 21세기 사이에서 혼돈을 겪는데, 시부야에서 열리는 도쿄 핼러윈 행사에는 100만명 이상 모인다. 질서가 일시 정지된 ‘카오스’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은 청년 정신의 특권이다.
이태원 참사는 페스티벌이 뭔지 모르는 기성세대가 만든 참극이다. 아무리 질서 있는 사회라도 기존 질서를 일시적으로 깨고 싶은 청년들의 에너지를 막을 수 없다. 행사가 진짜 비극이 되지 않도록 적절하게 관리하는 것, 그것이 페스티벌에 임하는 정부의 자세다. 이태원 핼러윈을 마약과 무질서의 현장으로 방송 기획을 했다는 용산구청장 얘기를 들으면서 한국 지배층의 옹졸하고 편견 가득한 시선 하나가 보여서 마음이 좀 그랬다. 페스티벌이 카니발로 전환되는 시점, 한국 청년들의 비극에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애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