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폐한 마음으로 망연자실 앉아 있다가 뭐라도 틀어놓고 싶어 유튜브를 실행했다. 간절한 마음에 보고 또 본 수많은 뉴스가 알고리즘에 반영되고, 한편 여러 유튜버가 업로드를 미루면서 펼쳐진 추천 영상의 광경이 있다. 사건, 사고를 다루는 각종 프로그램들. 진지한 시사 다큐멘터리도 있지만 패널들이 나와 사건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영상이 많았다. 어떤 프로그램에는 형사들이 나오고, 어떤 프로그램은 한 사람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어떤 프로그램은 패널들이 둘로 나뉘어 반론에 반론을 거듭하고, 어떤 프로그램은 목소리를 높여가며 화를 내고…. 그 광경 앞에서 마음이 착잡해졌다.
사건, 사고를 다루는 프로그램의 의의는 명확하다. 사건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도록 촉구하거나 범죄 수법에 넘어가지 않도록 경고하는 것. 방송에서 다뤄지면서 여론이 움직여 재수사를 하게 된다든지 사건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때도 적지 않다. 그러한 이유로 시청하면서도 이것은 좋은 시청이다, 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기도 쉽다. 실제로도 그런 측면이 있을 것이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우리가 이것을 혹여나 오락거리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께름칙함이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조심스럽게 선을 지키고, 피해자들의 심정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다. 대신 화를 내준다. 문제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프로그램에 따라 아슬아슬해보이는 순간도 있다. “ㅇㅇㅇ은 믿을 수 없는 잔인한 수법을 사용했다. 그 수법은…” 하고는 클리프행어로 광고를 삽입하게 된다면, 그러한 편집은 자극을 지연하여 기대를 증폭시키는 데에 가장 큰 목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더 큰 충격, 더 큰 경악을 위해 사용되는 구성이나 편집을 마냥 마음 편하게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동시에 단순히 비난만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라도 사건을 다루는 것이 낫지 않은가, 하는 내적 물음이다. 어떻게든 충격과 경악을 이끌어내서 여론을 환기시키면 사건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 수도 있으니까. 순수한 분노와 날카로운 지적으로만 세상이 바뀌기를 요구하는 건 무리한 일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거기에 사건 피해자의 자리는 어디쯤 있는지, 자꾸만 염려하게 된다.
처음부터 사건이 적합한 절차에 따라 제대로 처리되어 책임질 사람이 책임을 지고 죗값을 치러야 할 사람이 치렀다면 이런 프로그램은 생겨나지 않았을까. 지금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십년쯤 후에 이번 참사는 어떻게 남게 될까. 자꾸 많은 것을 묻고 또 묻게 되는 요즘이다. 그 무수한 물음에 도무지 답을 낼 수가 없어 온통 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