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제주-대구-안성-부산. 황금 연휴로 시작한 10월 들어서 다녀온 곳들이다. 황금색 벼를 바라보며 걷노라면 살아 있음을 느낀다. 끼니를 해결하려 들른 식당에서도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니, 예전의 그리웠던 활기가 온전치는 않아도 확연히 돌아오고 있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허락된 가상의 교류는 내 천성의 게으름과 결탁했다. 물건을 사거나 외식하는 행위마저 플랫폼의 혜택으로 대체되면서 콜라 한병마저 배달비로 해결하고 말았다는 인터넷 게시판의 고백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동의 당연함이 제외된 일상은, 체지방량 증가와 빠져버린 근육으로 간단한 외출마저 버거워진 비루한 나의 몸을 만들어냈다. 확실히 문제가 생길 것 같으니 이렇게 방치할 수만은 없다. 지방의 일정을 적극적으로 수락하고 승용차의 안락함도 과감하게 포기해야 ‘할 수 없이 걷는다’ . 정해진 일정으로 향하는 것도 ‘걸음’이고, 짬짬이 나는 시간을 메꾸려 지역의 명소에 들르는 것도 ‘걸음’이다.
걷다 보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던 풍경이 새삼 달리 보인다. 기분 좋은 바람이 상쾌하기 그지없고, 따뜻한 햇볕을 이따금 가려주는 가로수의 배치가 고맙다. 제각기 뽐내는 상점의 간판이 흥겹고, 부리나케 달리는 오토바이의 굉음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무엇보다 나처럼 걷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에 놀란다. 연배가 있는 분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무리를 지어 힘차게 걷는 모습을 보며, 왜 이 땅에 아웃도어 의류가 그토록 팔리고 있는지 피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수고로움의 결과는 고스란히 휴대폰의 건강 앱에 남는다. 예전 아버지가 허리띠에 매달아 차던 계보기는 하루에 일만보를 걸으란 의미로 만보계로 불렀다. 네 자리 숫자가 모두 0으로 채워지는 희열은 지금도 관성처럼 남아 있어, 하루를 꼬박 채워 만보를 걸으면 미뤘던 방학 숙제를 마친 듯 스스로가 그리 장해 보일 수 없다.
하루의 성적표가 즐거운 것도 잠시, 이번주의 나머지 날들을 보면 결과는 형편없다. 평균은 오늘의 분투로 올라갔지만 표준편차가 엄청나니 과락으로 통과가 불가능한 수험생이라 할 수 있다. 우울한 나의 마음은 이번달의 데이터를 돌아보며 작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월초에 비해 확실히 숫자의 배열은 우상향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오가 현실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증가의 추세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내친김에 지난 6개월간 데이터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시 지난 3년간 데이터를 살펴보며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바이러스를 피해 2년의 겨울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작지만 꾸준히 나아지고 있는 그래프의 모습은, 긴 동면 후 그 잠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음을 선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겨울잠에서 깬 우리는, 곰에서 두발로 걷는 사람이 된 이 땅의 호모 에렉투스로서 힘찬 한 걸음을 다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