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항상 지나간 다음에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현재를 증오한다. 그러니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다. 미래를 향해서 나가는 것이다.
- 장 뤽 고다르 <옛 장소> 중의 보이스 오버
그러니까 우리는 나침반을 잃으면 안 된다. 다시 한번 물어보자. 지금 영화의 질문은 무엇인가? 칸에서, 2002년 5월에, 해변에 젖가슴을 내놓고 누워 있는 여인들 저편의 바다 위에 신기루처럼 떠 있는 유럽 부르주아들의 유람선을 바라보면서, 방금 보고 나온 영화의 제목을 떠올리며, 딱딱한 밀가루 빵 안에 쑤셔넣은 햄과 야채와 마요네즈의 비빔범벅을 먹으면서, 내가 물어보는 것은 여전히 그것이다.
당신들은 칸을 왕오천축국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또는 여기서 모든 사람은 손오공이다. 또는 저팔계이거나 사오정이다. 또는 요물들과 괴수들의 아비규환이다. 나는 현장법사가 되고 싶다. 그러나 그래봐야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인) 질 자콥 손바닥 안의 놀음이다. 또는 영화를 발명했다는 자부심에 찬 유럽세계 안으로의 참혹한 여행이다. 그저 홀린 채 눈멀어서 아무리 아름다운 찬사를 늘어놓고 미사여구를 바쳐도 숨길 수 없는 사실. 여기는 제국주의가 벌여놓은 파티에로의 초대이다. 그 안에서 영화를 생각해야 한다는 끔찍한 사실을 배우고 인정하고, 그래서 거기서 다시 우리의 질문을 떠올려야 한다. 칸, 여기는 나의 슬픈 열대이다.
중국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또는 자기-오리엔탈리즘이런 제기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었다. 다이 시지에의 <발작과 중국인 재봉사소녀>(Balzac et la Taillleuse Chinoise, 주목할 만한 시선)을 보면서 투덜거렸다. 이 영화는 내가 올해 칸에서 처음 본 영화였다. 다이 시지에는 1989년 <중국, 나의 고민>으로 데뷔하였고,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한다. 그리고 14년 만에 본 그의 네 번째 영화는 이미 자기를 잃어버린 영화였다.
1972년 문화혁명 시절 하방된 두 ‘인텔리’ 청년은 거기서 똥지게를 짊어지고 산길을 올라야 하며, 탄광 안에 들어가서 하루종일 돌을 쪼아야 한다. 한 청년은 바이올리니스트였고, 다른 청년은 치과 인턴수업을 받던 중이었다. 그들은 무서운 마을 촌장을 속이면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곡을 마오쩌둥 수석을 찬양하는 곡이라면서 연주하고, 때로는 몰래 숨겨놓은 발자크의 프랑스 소설을 읽는다. 그런 어느 날 이 마을에서 재봉사로 일하는 할아버지의 손녀와 사랑에 빠지고, 그들은 하방당한 이 산 속에서 첫사랑을 나눈다. 그 소녀는 발자크의 소설을 그들로부터 들으면서 도시의 생활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소녀는 점점 발자크에 심취한 나머지 도시로 짐을 싸들고 도망친다. 그 이후 그들은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바이올리니스트와 치과의사는 텔레비전에서 양자강에 댐 공사를 하면서 물에 잠기는 옛 하방된 고장의 풍경을 보면서 추억에 잠긴다. 물이 차오르고 무중력 상태에서 책을 읽고 바이올린을 켜는 두 사람 옆에 앉아 있는 중국인 재봉사 소녀를.
이건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이다. 그렇다. 첸카이거의 <황토지>와 <아이들의 왕>을 서로 반씩 끌어들여서 만들어낸 이야기를 온통 감상주의와 중국 깊은 심산유곡의 풍경을 무대로 그려낸다. 물론 화면은 아름답고, 이야기는 달콤하다. 또는 다이 시지에 자신의 기억도 일부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이 영화는 자신의 자서전 소설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그 기억 속에서 역사와 함께 중국의 지금도 증발해버렸다. 행복한 하방? 지금 파리에 산다고 해서 문화혁명이 첫사랑으로 기억되는 것은 지아장커를, 왕샤오슈아이를, 허이를, 류쉐창을, 로우예를, 장밍을, 포스트 천안문세대를 능멸하는 짓이다.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또는 그 역; 아모스 기타이와 엘리아 술레이만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학살이 아니다. 중동의 문제는 복잡하고, 나라마다 서로 다르게 얽혀 있는 이해관계와 한편으로는 석유문제로 국제적인 관계가 끌려들어오고, 거기에 유대인 문제와 성지순례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겹쳐지면 영화를 보면서 이야기 자체를 놓치게 된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면서 이런 순간들이 가장 절망스럽게 여겨진다. 또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를 보아야 한다. 모든 영화는 재미있어야 한다고? 영화는 이해하기 쉬운 예술이라고? 영화는 대중을 즐겁게 해야 한다고? 영화제는 그런 질문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자리이다. 영화 속의 서로 다른 문화와 서로 다른 나라의 역사가 그 반대로 우리의 영화가 가진 편협성을 물어볼 것이다. <집으로…>를 보면서 이란의 관객은 얼마나 그 할머니가 낯설게 보이겠는가? 차도르도 두르지 않고, 남편이 거느렸던 다른 아내들과도 헤어진 채 혼자 살다니! <친구>를 보면서 아프가니스탄의 관객은 얼마나 신기하겠는가? <로스트 메모리즈>를 보면서 알제리의 관객은 그 이상한 식민지의 역사 앞에서 얼마나 괴이하겠는가? 나는 이스탄불의 영화를 보면서, 아르헨티나의 영화를 보면서, 부르키나파소의 영화를 보면서 부끄러워진다. 헐리우드와 유럽, 동남아시아의 영화들로부터 한 걸음만 나가면 문맥을 놓치고야마는 영화들과 수없이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세상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올해 경쟁에 온 두편의 영화, 아모스 기타이의 이스라엘영화 <케드마>(Kedma)와 엘리아 술레이만의 팔레스타인영화 <신의 간섭>(Yadon Ilaheyya)은 우리를 난처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케드마>는 한마디로 전쟁영화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쟁이 더이상 스펙터클이 아니다. 1948년 5월4일 오후 4시 케드마라는 배를 타고 나치 학살로부터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해서 약속의 땅을 찾아온다(배 이름인 케드마는 ‘동양으로’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대인 이민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영국 군인들의 총알이며, 그들은 하선하자마자 총을 들고 터키인들과 싸워야 한다. 아모스 기타이는 여기서 전쟁을 무대처럼 다룬다. 카메라는 총알을 뒤따르거나 또는 그 반대로 시체를 애절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그 대신 총을 든 이민자들을 따라가면서 이름없이 죽어가는 그들을 무심하게 쳐다본다. 그의 주인공은 계속 옮겨가고, 그 중심에 있던 인물들은 어이없이 죽거나 그 반대로 용기있게 죽는다. 그렇게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쏟아지는 사이를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터키 할아버지는 시장에 가야 한다면서 가로 질러간다. 이민자들은 총을 쏠 줄도 모르면서 전장터를 뛰어다니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멀다. 이들은 정말 신의 축복을 받아 이 땅에 온 것일까?
이 전쟁을 아모스 가타이는 알레고리로서 그려낸다. 그건 영화적으로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성서적인 언어의 세계관,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싸웠던 시대에 대한 신학적 시선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장터의 장면들은 정말 어떤 영화에서도 보지 못했던 이상한 비사실주의가 있다. 그건 과장도 없고, 그렇다고 상징도 없이 그저 벌어지는 전투를 그대로 재현하는 데도 그 모든 것을 역사 안에서 실현되는 테제로 어떤 영웅주의도 없이 피와 살을 승화시킨다. 브레히트적인 전쟁영화? 자꾸만 다시 생각나는 마지막 장면. 또다른 전선으로 가기 위해 지쳐서 트럭에 몸을 실은 이민자들을 바라보면서 노인은 <탈무드>의 구절을 혼자서 외쳐댄다. 그러나 그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인도 그저 계시처럼 쉰 목소리로 읊는다. 카메라는 노인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트럭을 따라 수평 트래킹으로 한없이 오간다. 어둠이 내리고, 트럭은 다른 전장터를 향해 떠난다. 아모스 기타이는 그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다. 저 슬픈 시선과 기억을 찾아가는 장면 사이에서 화해는 없다. 그들은 살아본 적이 없는 땅에 와서 그곳이 자신의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전쟁이라고 아모스 기타이는 생각한다.
목소리와 이미지, 낭송하는 마뇰 드 올리베이라의 연애극<마뇰 올리베이라>는 여전히 위대하다. 그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의 영화는 보아야 할 영화가 아니라 들어야 할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이인칭의 서간문체의 우주이기 때문에, 그 영화 속의 질서들이 쉽게 붙들리지 않는다. 화면을 아무리 바라보아도 이 사람과 저 사람의 관계를 알기 힘들다. 그래서 화면을 지켜보면서 정말 주의를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그건 이번 영화 <불확정의 원리>(O Principio da Incerteza, 경쟁부문)에서도 다시 반복된다. 그는 마치 편지를 낭송하듯이 사건을 전개시킨다. 때로는 느리지만, 그러나 화면은 거의 변한 장면이 없는데도 사건 사이의 점핑이 벌어질 때가 있다. 사건은 낭송을 통해서 이미 벌어진 것이고, 화면은 그 결과인 것이다. 사건없이 원인과 결과가 그저 단 하나의 장면으로 이어질 때, 그 안에서 이야기와 인물 사이의 결정 불가능한 바깥이 생겨난다.
그리고 올리베이라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심술을 부리기로 작정한 것 같다. 그는 아홉명의 인물을 내세운 다음 그들에게 이름과 별명을 함께 붙이는데, 이제 그 이름과 별명을 뒤섞어서 부른다. 우리는 영화에서 인물의 호명이 의외로 쉽게 기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또는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을 대부분 얼굴을 보고 기억할 뿐이며, 이름을 그저 지나친다. 그러나 올리베이라의 영화에서는 그럴 수 없다. 이름과 인물이, 한 인물에 두개의 이름이 뒤따라가거나 화면과 관계없이 불릴 때, 거기에는 불확정이 가져다주는 고정점의 붕괴가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올리베이라의 영화에서는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들으며 이야기를 구성하면서 눈앞에 보이는 인물을 따라가야 한다. 보이는 것을 무력하게 만들고, 활동사진의 전통에서 축음기의 세상으로 이끄는 올리베이라는 여전히 신기한 영화를 만든다.
두명의 늙은 형제 다니엘과 토르카토가 나누는 이야기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둘은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문제는 같은 이야기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번갈아 하니까 이제 영화는 여기서 잘못 기대는 순간 두리번거리게 된다. 그들의 관심은 동갑내기 가문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안토니오와 그 집의 하녀의 아들 호세이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친구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카멜리아를 사랑한다. 천사 같은 카멜리아. 그 둘은 한 소녀를 사이에 두고 갈등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화면에서는 호세의 갈등만 보여지고, 안토니오의 갈등은 말로 들어서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갈등에 대한 다니엘과 토르카토의 견해가 다르다. 더 난처한 점.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성처녀 카멜리아는 남자들의 게임의 규칙 속에서 음란한 연애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그런데 그것도 듣고서 알아야 하며, 영화에서는 만찬의 장면만이 이어진다), 그 희생을 감내하는 대신 교활하게 변해간다. 그런데 그것도 그렇다고 말하는 다니엘의 생각일 수도 있다. 또는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계속하던 올리베이라는 마지막에 정반대의 인물이 되어버린 카멜리아를 보여주면서 끝낸다.
여기서 올리베이라는 다시 그의 원래의 무대, 그러니까 <프란치스카>(1980), 혹은 <아브라함의 계곡>(1993)의 수수께끼처럼 얽혀들고 그 안에서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여자들의 선택에 대한 구원없는 진행, 또는 아름다운 부르주아 질서 안으로 초대한다. 그 두 가지는 사실 올리베이라가 보기에는 한 가지이다. 왜냐하면 부르주아들의 세상에서 사랑은 거래이고, 그 안에서 남자들이 이윤을 남기려 드는 동안 여자들은 종교에 자신을 바치기로 결정하면서 갖는 그 덧없는 희망이, 거래와 희생이라는 모습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올리베이라는 우리 시대에 19세기적인 상상력을 갖고 거슬러올라가서 다시 생각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가 종종 산문적이고, 때로는 낭독을 통해서만 숨겨진 질서와 음모의 주사위가 던져지는 순간 우리는 이제 더이상 영화관의 관객이 아니라 이미 사라져버린 규방문학의 신기한 세상으로 불려온 것이다. 여자들은 항상 진다. 그러나 그 패배 안에서 남자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럼으로써 올리베이라는 불확정의 원리 속의 예정조화를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포르노에 관한 포르노, 또는 카트린 브레이야의 <아메리카의 밤>칸은 거의 대부분 엄숙하게 진행된다. 공식 저녁시사는 무조건 정장에 남자들은 나비 넥타이를 매야 하고, 영화관람은 자기가 쥔 카드가 무엇이냐에 따라 입장순서가 바뀐다. 경쟁부문의 감독들은 리무진을 타고 거만하게 나타나서 환호하는 관객을 향해 손을 흔든다. 그러나 거기서 좀 떨어진 노가힐튼에서 진행되는 감독 주간(Quizainne des Realisateurs)에 가면 갑자기 다른 영화제에 온 것처럼 활기가 넘친다. 감독 주간은 프로그래머도 다르고, 상영관도 서로 다르다. 그래서 감독 주간에 가면 항상 프로그래머가 감독과 올라와서는 한마디 던진다. “여러분들, 여기서는 나비 넥타이도 필요없고, 정장도 필요없어요, 그렇죠?” 그러면 젊은 관객은 일제히 박수와 발을 구르는 환호로 대답을 대신한다. 바로 그 감독 주간의 올해 개막작은 카트린 브레이야의 <섹스는 코미디>(Sex is Comedy)이다. 그녀를 ‘악명높게 만든’ <로망스 X> 이후(<나의 언니에게>를 경유하여) 2년 만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일종의 후일담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 것. <섹스는 코미디>는 <로망스 X>의 후일담이 아니라 그 영화를 만든 과정의 후일담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화에 관한 영화이자 자기 영화의 자서전이다. 빙빙 돌려 말할 것 없이 한국식으로 말하면 ‘프랑스판’ <빤스벗고 덤벼라>이다.
여자감독(안 파리요)은 지금 신경이 곤두서 있다. 지금 섹스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여자는 신인이라서 가능하면 조금만 벗고 쉽게 끝내고 싶어하고, 남자는 이미 짜증을 내면서 그저 출연료를 받았으니 하면 될 거 아니냐는 투다. 바닷가의 모래 언덕에서 사랑을 느끼는 두 사람을 찍는 한여름 장면이 지금 벌벌 떨면서 한겨울에 진행되는 중이다. 여자감독은 이들을 데리고 세트장으로 들어간다. 소품을 담당하는 스탭이 섹스장면에 사용될 인조 ‘자지’를 다섯 종류로 가져와서 감독의 허락을 받는다(이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높아지는 여자들의 웃음소리. 그 반대로 영화에서 여자의 ‘보지’가 나오면 갑자기 심각해지는 남자들의 침묵). 그중 하나를 선택하고, 그걸 남자배우는 팬티처럼 입고 이제 섹스장면을 찍어야 한다. 끊임없는 엔지장면의 연속. 감독과 배우들과의 사이는 야수처럼 으르렁대면서 어르고 달래고 소리지르고 속이고 어떻게 해서든지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든다.
카트린 브레이야는 영화에서 단 하나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벌이는 심리적인 포르노를 만들어낸다, 영화감독은 배우들이 옷을 벗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벗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을 벗지 않기 위해 배우들은 버티는 것이다. 그걸 영화감독은 끈질기게 설득하고 영화 속의 인물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기 위해 말 그대로 쥐어짠다. 영화현장을 찍는 영화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영화 속의 영화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그건 심리적 한계선을 넘는 섬광 같은 선물이다. 그리고 <섹스는 코미디>의 마지막 순간 마침내 섹스를 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여배우의 얼굴에서, 그 눈물에서, 그 치밀어오르는 울음소리에서, 영화 속의 감독이 기어이 그걸 얻어내는 순간 카트린 브레이야도 바로 그 마법의 순간을 얻어내고야 만다. 브라보! 이 영화는 카트린 브레이야의 의심할 바 없는 최선의 ‘내면적’ 포르노이다.
사진설명
1. <발작과 중국인 재봉사소녀>
2. <신의 간섭>
3. <불확정의 원리>
4. 감독 주간에서의 포럼. 영화 상영과 함께 항상 포럼이 열리는 곳이다. 뒤에 Quinzaine des Realisateurs라고 쓰여 있는 천막이 감독 주간 포스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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