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안은 로만 폴란스키(69)의 <피아니스트>는 1939년 나치의 폴란드 침공 이후 바르샤바에서 벌어진 유대인 박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영화가 그린 바르샤바 게토는 그대로 지옥이다. 그들이 당한 부당한 박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파하고 분노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나는 시종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다. 유대인 박해 장면을 볼 때마다, 유대인들이 지난 반세기 동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저질러온 가혹행위가 오버랩되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의 매끄러운 만듦새를 보면서 혹시라도 칸이 이 영화에 황금종려가지를 후광으로 얹어주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우려가 현실로 드러났을 때, 칸의 모든 정치적 고려가 고지에서 내려다본 고샅길처럼 선명하게 드러났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칸은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사실대로 그린 이스라엘 감독 아모스 기타이의 <케드마>와 팔레스타인 감독 엘리아 술레이만의 <야돈 일라헤이야>를 나란히 경쟁에 초청하고, ‘반유대주의’라는 비난을 막기 위해 폴란스키에게 영광을 안긴 것이다. 균형감각이 돋보이는 매끈한 ‘정치’다. 그러나 나는 칸의 이런 정치보다,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가해사실엔 눈감으면서 자신들이 당한 피해사실에 대해선 집요하게 파헤치는 유대인 사회가 더 무섭다. 유대인은 흔히 지혜의 겨레라고 불린다. 나는 궁금하다. 그 지혜로운 겨레가 왜 자신들이 당한 박해로부터는 어떤 보편적 교훈을 끄집어내지 못하는 걸까. <탈무드>에는 “머리 둘 달린 아이를 한 사람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두 사람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유명한 질문이 있다. 답은 이렇다. “한쪽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다른 쪽 머리가 비명을 지르면 한 사람이고, 다른 쪽 머리가 시원해하면 두 사람이다.” 유대인은 <탈무드>의 우화처럼 자신이 당한 아픈 기억엔 소리 높여 비명 지르고, 자신이 저지른 악행엔 둔감한 머리 둘 달린 아이인 건 아닐까. 우리는 에서 <쉰들러 리스트>에 이르기까지 유대인이 당한 고통을 스크린에서 충분히 볼 만큼 봤다. 오늘의 팔레스타인 비극을 외면하면서 어제의 아우슈비츠만 강조하는 건 중증의 균형감각결핍증후군이다. 유대인들은 흔히 머리 둘 달린 아이의 우화를 응용해, “러시아의 유대인이 박해를 당했는데, 파리의 유대인이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면 그는 유대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의 적용범위를 조금만 더 넓히면 좋겠다는 게 내 작은 바람이다. “아우슈비츠를 아파하면서 팔레스타인을 아파하지 않는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다.” 이상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