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전원합의체 판결로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배상을 인정했다.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나 개정 요구, 긴급조치에 대한 비방, 학생의 집회·시위를 영장 없이 처벌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었다. 학생이 집회에 나가면 이유 불문하고 긴급조치 9호 위반이 되었다. 유신헌법을 비판하면 긴급조치 9호 위반이 되었다. 긴급조치를 비판하면 최종적으로 모두 긴급조치 9호 위반이 되었다.
2013년, 긴급조치 9호가 위헌·무효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백기완 선생 사건을 필두로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형사 재심이 시작되었다. 변호사들이 긴급조치 재심 사건을 나누어 맡았다. 가장 젊은 당사자들도 이미 쉰살을 넘긴 때였다. 그는 체포 당시 미성년자였다. 판결문의 범죄사실은 다음과 같다. ‘1978년 6월26일 19:00경 서울 종로구 세종로 211 소재 국제극장 앞에서 유신철폐 등 구호를 외치며 서대문쪽으로 진행하는 약 100여명의 학생 시위대에 가담하여 30m가량 진행함으로써 불법학생 시위를 한 것.’
1978년 6월26일은 소위 광화문연합시위가 있었던 날이다. 1978년 6월12일 서울대학교 학생회는 2쪽짜리 ‘학원민주선언’을 발표했다. 6월26일 저녁 6시에 세종로 네거리에 모여 “박정희는 물러나라”, “유신독재 철폐하고 긴급조치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날 세종로 사거리에는 추산 약 3천명이 모였다. 18살 나이에 세종로 사거리에 섰던 젊은 서울대생도 세종로에서 30m를 걷고 체포된 다음, 135일을 미결구금되어 있다가 징역 장기 1년6월, 단기 1년형을 받았다. 같이 모인 학교 선배들도 다들 비슷한 형을 받았다. 소위 정찰제 판결이었다. 다들 구속형을 받고, 학교에서 제적당하거나 회사에서 해고되었다. 가족들은 사상범, 간첩 가족으로 낙인찍혔다.
2015년,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 위반에 대한 국가의 민법상 손해배상책임을 부인하는 판결을 했다. 당시 나에게는 대법원 판결을 보고 민사소송 진행 여부를 결정하려던 긴급조치 9호 사건이 있었다. 의뢰인은 민사소송을 포기했다. 이미 국가 폭력의 피해자로 한번 밀려났던 삶에는 판례 변경을 위해 수년을 더 싸우고, 인지대와 송달료를 내고, 법원에 갈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도 권할 수 없었다.
2015년의 판례를 변경해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이번 대법원 판결의 판결금은 1천원이었다. ‘원고의 패소 부분 중 1천원 및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 부분을 각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한다.’
나는 판결문을 읽고 7년 전 대구고등법원의 법정 앞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노인을 떠올렸다. “민사는 안 할게요. 이제 됐어요”라고 말하던 이의 나이보다 거칠고 주름진 손, 굽은 등을. 역사에 이름이 아니라 6월26일의 3천여명으로 남은 시민들이 치른 대가를. 크고 작은 시위에 섰던 사람들, 그들로부터 국가가 앗아간 것, 그리고 1천원짜리 상고를 하고 몇년을 기다렸을 마음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