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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현실의 <색녀열전>
2002-05-30

더 세게, 더 밝혀줘!

이 시기, 이 잡지에 <색녀열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이게 무슨 말인지 궁금한 분이 있으면 인터넷의 자유게시판과 독자의견만 보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씨네21>이 창간하던 해에 쓴 <오! 나의 여신님>에 대한 격렬한 반론을 마지막으로 기고하는 글마다 변변한 피드백 하나 없는 글발 약한 필자에게 그 위험은 달콤한 독이 될 수도 있을 터인데 결국 이 만화를 선택하고 말았다. <색녀열전>를 읽고 난 감상부터 먼저 싹둑 잘라 이야기하자면, 그다지 충격적인 경험도, 새로운 즐거움도, 잘 구성된 새 책이 주는 매력도 없었다는 것이다.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과 경험을 드러내지 못한 만화다.

해석없는 뻔한 이야기

출판사에서는 “밝히는 여자들의 섹시하고 통쾌한 성에 관한 만화”라고 설명했지만, <색녀열전>에서 그려진 성은 일본의 레이디스 코믹스의 솔직함이나 통쾌함에 비하면 훨씬 더 불투명하고 지겨웠다. 일본의 레이디스 코믹스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 작품에 등장한 여성향 만화들이 보여준 성에 대한 적극적 해석과 수용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색녀열전>의 많은 소재들은 문고판으로 조잡하게 편집한 한국 전래 민담집이나 야담집에서 접해왔던 낯익은 에피소드들이었고, 그 에피소드에서 성에 관한 여성들의 통쾌한 시각을 읽기는 어려웠다.

혹 여성작가가 여성독자들에게 성에 대한 ‘농담’을 한다는 것만으로 ‘성에 관한 만화’라는 수사를 붙였다면 그건 ‘오버’다. 야오이 만화처럼 여성들이 선택적으로 자신들이 즐기기에 적당한 시각적 환상을 담은 성애만화는 무척 많다. 수사가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성에 대한 여성적인 시각의 적극적 해석이 있어야 하나 거기까지는 나가지 못하고 있다. 낯익은 에피소드들이나 장황한 내레이션을 동반한 에피소드들이 이야기의 상투성을 더욱 강화할 뿐이다. 작가 장차현실이 보여준 선 중심 작화는 풍부한 서사를 풀어가기보다는 짧고 명쾌한 에피소드에 적당했으며, 일정한 분량을 넘어서는 이야기는 과도한 내레이션에 기댈 수밖에 없어 작품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다.

이번에 단행본으로 출판된 <색녀열전>보다 작가의 매력을 100% 느낄 수 있는 작품은 인터넷한겨레에 연재중인 <장현실의 현실을 봐>라는 만화다. 장애가 있는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작가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삶에서 걷어올려진 이야기들이 촘촘히 풀어져 있다. 연재된 만화를 읽다 공감의 주파수가 일치하고 나면, 작가의 삶은 내 삶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만화를 통해 작가의 삶이 고스란히 노출되고, 나는 그 소소한 일상을 저인망으로 훑어낸 작가의 능력에 매료된다. 역시 감동이란 솔직함에서 온다. 홍승우의 <비빔툰>, 정연식의 <또디>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첫 번째 이유도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솔직함에 있다. 그 연장에서 나는 <색녀열전>보다 <장현실의 현실을 봐>를 좋아한다.

<색녀열전>에 수록된 작품들은 <장현실의 현실을 봐>처럼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지 못한다. 상상력의 무게가 제각각이어서 어느 작품은 유쾌하고, 어느 작품은 빈약하다. 유쾌한 작품만 서핑하듯 골라 읽을 수도 있지만 선택적 독서를 방해하는 것은 책의 모양만 고려한 잘못 다듬어진 편집이다. 잘 만들어진 표지와 <비빔툰> <또디>의 장정을 따라간 정사각형에 가까운 변형 판형은 출판사의 기획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를 겨냥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러나 모양에 맞춘 본문 편집은 만화의 재미를 감소시켜버렸다. <비빔툰>이 좌우로 긴 칸의 배치를 한 페이지에 넣기 위해 칸의 크기를 조절했던 적이 있지만 그 만화는 보통 8칸으로 10칸 미만이다. 신문에는 가로로 길게 배치되었지만, 그 칸을 위아래로 조절해도 큰 무리는 없다. 어차피 한 띠로 이어진 코믹스트립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직사각형에 여러 칸으로 나뉘어 들어 있는 <또디>는 한바닥만화의 장점을 존중해 처음에 작가가 만든 한바닥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색녀열전>은 잡지 판형에 연재된 작품을 정사각형에 가까운 단행본 판형에 맞추기 위해 만화를 이리 자르고 저리 잘라 이어놓았다. 애초에 작가가 의도한 칸 나누기는 사라졌고, 그 때문에 이야기도 거칠게 넘어간다.

<색녀열전>을 보고 있으면 일반적인 만화와 다른 동양화의 선을 발견할 수 있지만, 애초에 작가가 구성한 화면이 무너진 순간 선의 매력도 사라져버린다. <색녀열전>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클 것은 적고, 적을 것은 커 가지고” 만화를 재미없게 만들어버린다. 만화 단행본을 만드는 편집자들은 먼저 만화의 구성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강한 상상력을 기대한다

여러 불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만화, <색녀열전>에 연대의 지지를 보낸다. 장차현실의 꾸준한 여성주의적 작품활동과 이 만화가 연재된 여성저널 <이프>의 건투를 빈다. 이 땅에서 가부장(남자 혹은 아들)으로 산다는 것이 불행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솎아낼 만큼 많아 보이지도 않는 그들이 솎아낼 사람들을 찾아야 할 정도로 이 땅에 번성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때쯤이면 가부장이 되기 싫은 가부장들이 느껴야 하는 고통이 어느 정도는 약화되겠지. 다시 한번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장차현실의 신작 <색녀열전>은 약하다. 밝히는 여자도 별로 없고, 섹시한 여자도 없으며, 용감한 여자도 많지 않다. 남근적인 상상력이 강력하게 증폭된 <누들누드>와 비교한다면, <색녀열전>의 상상력은 너무 소박하다. 소박한 아름다움을 즐기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면, 강하게 더욱 강하게 이야기했어야 한다. 민담이란 정체불명의 서사에 기대지 말고 더 솔직히 여성의 성적 판타지를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색녀열전>이 완성될 것이다. 작가와 잡지가 더 센 무엇을 보여줄 그때를 기다린다. 박인하/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

사진설명

한국 전래 민담을 소재로 한 <색녀열전>. 여성들의 통쾌한 시각을 읽기 어렵다는 점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