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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아, 기회의 땅으로! <검볼걸즈>
2002-05-30

anivision

“더이상은 참을 수 없다! 방송법, 개정하라!!” 지난 5월21일, 250여명의 관계자가 모인 가운데 열린 ‘방송용 국산 창작애니메이션 의무방영 총량제 관철을 위한 방송법 개정 서명운동 발대식 및 법개정 촉구 결의대회’는, 현행 국산 TV애니메이션 의무방영제를 더이상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애니메이션계의 응집된 결의를 담아낸 행사였다. 똑같은 작품을 100번 이상 틀어도 방영비율만 맞추면 되는 파행적인 현행 의무방영제 속에서, 국산 창작물이 갈 곳 없어진 지는 벌써 오래다. 이번에 소개하는 26부작 TV시리즈 <검볼걸즈>처럼, 아예 해외 시장을 타깃으로 하는 작품이 증가하는 것도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기어씨지아이가 기획중인 <검볼걸즈>는 4명의 여고생으로 구성된 록밴드 ‘검볼걸즈’의 모험을 다룬 3D애니메이션이다. 검볼걸즈는 크고 작은 무대를 가리지 않고 전세계를 돌면서 공연한다. 주인공 쥬시, 페퍼민트, 레인보우, 슈거프리는 투어 콘서트 일정 속에서 악기 세팅과 사운드 체크, 작곡, 녹음 등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웬일인지 가는 곳마다 공연을 방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한가한 농촌 도시 축제날에는 모든 동물이 일제히 잠에 빠지고, 학교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 모두들 꽉 조이는 청바지를 입고 다닌다. 왜일까. 매번 일어나는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검볼걸즈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평범한 소녀들이 각자의 특기를 이용해 사건을 해결하는 <검볼걸즈>는 이들이 공연시간에 맞춰 아슬아슬하게 무대에 서는 마지막까지, 보는 이를 긴장하게 만든다. 4분30초의 데모 영상과 2화 분량의 시나리오가 나와 있는 이 작품은 화려하고 사실적인 3D 영상이 아니라 스토리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보는 이를 흡입할 수 있는 스토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게 제작진의 생각인 것이다. 미국인 웬디 엥겔버그, 에이미 엥겔버그가 시나리오를 담당하고, 뉴라인시네마에서 스토리 애널리스트로 활동한 바 있는 동포 2세 데이브 김이 프로듀서를 맡았다. 미국에 지사를 두고 있는 제작사 기어씨지아이는 마돈나가 운영중인 매버릭엔터테인먼트와 합작법인을 추진, 현재 마지막 단계를 남겨놓고 있다고 밝혔다. 합작법인을 통해 미국 내 교두보를 마련할 계획인 것이다. 음악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록밴드 이야기인 만큼, 브리트니스 스피어스 등의 가수를 배출해낸 매버릭엔터테인먼트와의 연계는 더욱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제작진은 내다보고 있다.

몇년 전에 기획된 탓인지 캐릭터가 약간은 투박하게 느껴지는 <검볼걸즈>. 그러나 탄탄한 스토리에 빠져들다보면 어느새 그런 약점을 잊게 된다. 캐릭터가 생생하고 개성적이어서, 각자의 다양한 특징은 물론 즐겨 입는 옷차림까지 구체적으로 그려냈다. 직설적이고 토론하기 좋아하고 남자에게 관심 많은 리드싱어 쥬시는 치어리더 복장을, 해킹에 능한 사상가 스타일인 키보드 담당 레인보우는 히피 스타일을 좋아하며, 지나치게 활동적이고 트렌드에 밝은 페퍼민트는 늘 사람들의 엉덩이를 차고 싶어한다. 드러머 슈거프리는 차분하고 언어에 능통해서 언제나 사건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검볼걸즈’라는 그룹 이름처럼, 본명보다 재미있는 닉네임을 애용하는 소녀 4명이 미국의 트랜드를 강타할 수 있을지는 두고봐야겠지만, 현재로서는 척박한 한국보다 오히려 해외가 ‘기회의 땅’인 것이 사실이다. 방송법이 국산애니메이션 의무방영 총량제로 전환되면 헌법소원도 불사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히는 방송사가 있는 한, 우리 애니메이션계의 현실은 암담하다. 김일림/ 월간 <뉴타입> 기자 ill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