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단은 출장이었다. 집에서 역까지 한 시간을 가야 하고 역에서 다시 세 시간 동안 고속열차를 타야 하는, 왕복으로 여덟 시간이 드는 강연 일정이 잡혀 있었다. 이렇게 긴 이동 시간 동안 하염없이 한 가지 일만 할 수는 없고, 책을 한참 읽다가, 굳어가는 목을 느끼며 몸을 요상한 모양으로 비틀어 기지개를 폈다가, 태블릿 컴퓨터와 키보드를 꺼내 도각도각 일을 보다가, 시끄럽게 떠드는 옆자리 사람들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말도 했다가, 집에서 챙겨온 커피도 쭉쭉 마셨다가, 최후에는 유튜브를 봤다. 유튜브 알고리즘님, 오늘 저에게 무엇을 점지해줄 것인가요.
이번에 선택된 건 머리를 쓰는 온갖 예능 프로그램의 짧은 클립들이었는데, 이건 아마도 <놀라운 토요일>을 즐겨 보는 나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물인 것 같다. 엄청난 추리로 가사를 잡아내는 출연진의 활약을 보는 것으로 시작해 방탈출 같은 퍼즐을 푸는 영상들을 거쳐 남자 연예인들이 각종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는 쇼에 이르러 문득 깨달은 것은 마지막 쇼에는 여자 연예인들이 간헐적으로만 출연하며, 기본적으로 머리 좋은 남자들이 문제를 푸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었다. 어라, 저거 재미있어 보이는데 여자들이 하는 것도 있으면 재미있겠다. 시청자의 호기심으로 떠오른 생각을 막 쓰다보니 유튜버의 본능에도 반짝반짝 불이 들어왔다. 재미있는 거 만들고 싶다!
소셜 미디어에 생각나는 대로 간단하게 아이디어를 냈는데 생각한 것 이상으로 좋은 반응이 돌아왔다. 대체로 ‘머리 쓰는 여자들’을 예능 프로그램으로 보고 싶다는 반응이었고, 내가 보고 싶다고 생각한 걸 그들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몸을 쓰는 여자들, 사람들을 웃기는 여자들이 있다면 머리를 써서 근사하게 문제를 푸는 여자들도 볼 때가 되었지. 그러고보니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머리 쓰는 여자들을 언제 봤던가? 전문가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에도 여성 출연자의 비율은 턱없이 낮았고, 평론가가 나와 이것저것을 평가하는 프로그램에서도, 지식을 가진 사람이 나와 패널들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에서도 그래왔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지식을 가진 똑똑한 여성은 충분히 많다. 이 풍부한 인재풀을 이제는 활용할 때가 된 것 같다.
이 아이디어가 실현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세상에 씨앗처럼 뿌려둔 아이디어는 스멀스멀 자라나서 결국 누군가에 의해 구현이 될 거라고 믿고 있다. 무엇보다 내가 시청자로서 너무 보고 싶은걸! 여러분도 그렇다면, 두 손을 모아 멀리멀리 소리쳐보자. 우리가 이런 것을 보고 싶어 한다고. 여기에 시청자가 있다고. 그곳에 사람이 모인다는 점이 보장된다면 당연히 만들어질 확률도 높아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