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단편영화 <진실 리트머스>에서 섬세한 눈빛과 단호한 목소리를 선보인 이제훈은 5년 뒤인 2011년 <파수꾼>과 <고지전>을 통해 자기만의 독보적인 자리를 확장해나갔다. 드라마, 영화를 종횡무진해온 그는 말간 얼굴 위로 진실된 표정을 유려하게 그려냈다. <어나더 레코드: 이제훈>(이하 <어나더 레코드>)은 데뷔 17년차인 그의 역사에서 가장 솔직담백한 작품일 것이다. 어제의 초심과 오늘의 고민, 내일 하고 싶은 일 등 대중이 여태껏 보지 못한 배우 이제훈의 여집합을 허심탄회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남매의 여름밤>으로 다정한 가족 관계를 담담하게 그려낸 윤단비 감독은 이제훈과의 긴 대화를 통해 영화 중간마다 작은 상상을 덧붙였다. 자칫하면 무거워질 수 있던 인물 다큐멘터리가 ‘시네마틱 리얼 다큐멘터리’라는 신비스러운 이름을 가질 수 있던 것은 단연 윤단비 감독의 경쾌한 시선 덕분이다. 덜어냄으로써 본질에 가닿는 이 다큐멘터리는 인간 이제훈을 향한 또 다른 기록이다.
<어나더 레코드>에 참여하기로 한 계기가 궁금하다.윤단비 쇼박스로부터 처음 연출 제안을 받았을 때 내가 지금까지 시도해본 적 없던 형식이라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당시 이제훈 배우가 확정된 상황이었는데, 배우의 필모그래피 외에 흥미로운 얼굴을 발견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영화 작업을 해오면서 개인적으로 30대 남성배우와 함께한 적이 없어서 작업 경험을 확장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제훈 영화, 드라마를 작업해왔지만 아티스트로서 새로운 도전을 계속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오디오 작업과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을 시도해왔다. 그런데 다큐멘터리에 나를 주제로 드러내는 건 지금까지 해보지 못한 형태의 작업이었다. 살면서 나의 진솔한 이야기를 펼칠 기회가 그렇게 흔하지 않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떤 길을 가고 싶은지 정리할 중간 기록물이 될 것 같았다.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솔직한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담는 게 부담되진 않았는지.이제훈 예전에는 작품에 임하면 개인적인 이야기나 사생활을 드러내기보다 작품 속 캐릭터가 되는 데 더 집중했다. 그래야 관객도 작품에 자연스레 이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제훈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고 어떤 의외성이 있는지 보여주고 싶다. 처음엔 부담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진솔하게 한 꺼풀을 내려놓아보자는 마음으로 임하니 편안해졌다. 무엇보다 관객이 이러한 작품을 친근하게 여기고 재미있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듯하다. 작품 속 이제훈과 개인 이제훈을 분리하고 각각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이해해준다.
윤단비 그래서 촬영마다 일부러 슬레이트를 치지 않고 시작했다. 슬레이트를 치는 순간 촬영이 시작됐다는 생각에 경직될 것 같았다. 카메라가 돌아간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 편한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했다. <남매의 여름밤> 때는 카메라 한대로 작품을 찍었는데, 이번에는 5~6대를 상시로 돌렸다. 모든 장면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이 작업을 통해 이제훈 배우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가 굳어지거나 환상이 깨질까 고민했다. 자연스러운 연출이 중요했던 이유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기존 관찰 예능 프로그램과 차별을 두기 위해 너무 재미에만 몰두하기보다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를 꺼내보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시네마틱 다큐멘터리라는 구성이 참신하다. 사실적으로 인물을 보여주면서도 픽션의 요소가 가미돼 있다.
윤단비 촬영 회차가 짧다보니 단순히 이제훈 배우를 쫓아다니는 것만으로 영화를 완성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화 중간에 꼭지처럼 픽션을 넣어 중심을 잡으려 했다. 이 픽션도 극본적 상상은 아니다. 이제훈 배우와 함께 흘러가듯 나누었던 이야기를 중심축으로 구상해낸 것이다. 이를테면 ‘만약 배우가 되지 않았으면 어땠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나한테 관심이 없으면 어떨 것 같아요?’ 같은 테마가 대화에서 시작되었다.
다큐멘터리 촬영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벌어진 일 중 작업물에 담기지 않은 장면이 있다면.
이제훈 한국예술종합학교에 가서 촬영하던 날이었다. 학부 시절 25살에 신입생으로 들어가서 연기와 배움에 대한 갈증이 너무 커서 3~4시간 자며 학교를 다녔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당시 나보다 더 열성적인 친구가 한명 있었는데, 그 친구가 마침 학교에 있었다. 10년 만에 우연히 만나다니… 그것도 학교에서!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윤단비 그때 친구 분이 임신한 부인과 함께 계셨다. 10년 전만 해도 모든 것을 나누던 친구와 이젠 각자의 길을 걸으며 삶을 살아가는 뭉클한 느낌이 들어서 영화에 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결국 오랜 논의 끝에 영화에 넣진 않았지만 내게도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박정민 배우와 <파수꾼>으로 과거를 이야기한다면, 이동휘 배우와 <블루 해피니스>를 통해 미래를 이야기한다. 과거부터 미래까지 쭉 돌아보면서 책 한권을 읽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제훈 지금 시점에 <어나더 레코드>를 촬영하게 된 의미가 크다. 앞으로 배우로서 살아갈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종종 생각해본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기를 못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언젠가 내가 세상을 떠나면 나는 남은 기록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될 텐데, 그 부분을 <어나더 레코드>를 통해 이야기할 수 있어 특별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나를 보여줄 수 있었다. 연결고리 속에서 나라는 사람이 차곡차곡 정의되는 것 같았다.
윤단비 친한 친구를 섭외한 것은 이제훈 배우가 촬영에 편하게 임할 수 있길 바라서였다. 무엇보다 다큐에 등장하는 모든 이가 이제훈 배우에 관해 말할 수 있어야 했다. 단편적인 이슈의 나열이 아니라, 영화 전체가 배우 이제훈을 관통해야 했다. 다만 출연진의 성향에 따라 무드가 자유롭게 조정된 것은 예상하지 못한 재미였다. 영화 제작사 하드컷의 양경모 감독과 김유경 대표를 만났을 땐 차분하고 단단한 느낌이라면, 박정민 배우나 이동휘 배우와는 둘뿐인데도 왁자지껄한 느낌이 난다.
집을 보여주지 않은 이유
<어나더 레코드>에는 인물 중심 다큐멘터리에 꼭 등장하는 집이 나오지 않는다.윤단비 어디까지 담을 것인지, 어디까지 드러낼 것인지 고민을 많이 했다. 구성을 잡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자동차 운전 신이나 집 안을 노출시키지 말자는 거였다. 이 과정에서 마틴 스코세이지의 다큐멘터리를 참고했다. 사적인 영역을 파고드는 게 반드시 솔직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이제훈 배우의 가치관이나 의외성, 평소의 생각 등을 담아내려 했다.
배우 이제훈이 아닌 감독과 제작자 이제훈의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뤄진다. 관성이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을 확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훈 물론 배우로서의 역할이 나에게 가장 중요하다. 동시에 배우에서부터 나를 확장하고 싶기도 하다. 이런 선택은 결국 내딛어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물론 모든 일엔 위험성이 따르지만 나는 인생이 길다고 믿는 편이다. 더 멀리 볼 줄 아는 게 중요하다. 지금껏 살아온 날들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더 많다. 그 긴 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하고 싶다. 어느 순간 부침이 있던 시기도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에 직진하고 싶은 마음엔 변함이 없다. 물론 20대 중반에 불안하고 초조했던, 나도 모르게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영화인 선배를 만나 깊은 통찰을 배우고 그들의 현재를 나의 미래로 되짚어보면서 배우로서 많은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동시에 내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일을 떠올리면서 점점 더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윤단비 이제훈 배우가 김유경 하드컷 대표와 대화를 나누면서 모든 컷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자신의 머릿속 그림을 배우들이 구현해주어 고맙다는 말을 할 때 연출자로서 많이 공감했다. 이젠 이제훈 배우도 감독으로서 이 고충을 아는구나, 동질감을 느꼈다. (웃음) 사실 작업하다 보면 전체 맥락에 맞지 않는데도 유독 사랑스럽게 느껴지거나 애착이 가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결국 편집해야 하는 순간이 오고야 마는데 아쉬움이 굉장히 크다. 그럴 땐 연출자이면서 동시에 제3자인 것처럼 균형을 잡으려 한다.
<어나더 레코드>는 전반적으로 빼기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처음엔 이제훈에서 배우를 빼보고 그다음엔 이제훈의 인지도를 빼보면서 점차 본질에 다가간다.
윤단비 나는 영화감독이지만 관객으로서도 영화를 무척 사랑한다. 나에게서 영화를 뺀다면 나의 정체성을 설명하기 힘들 것 같다. 그런데 이제훈 배우도 영화와 연기가 자기 삶에 몹시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더라도 조금씩 걷어내보려 했다. 배우 아카이빙이라 하면 대부분 필모그래피를 나열하며 연기의 변화를 정리한다. 그런 방식을 취할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인간적임을 더 강조하기 위해 제일 큰 정체성을 빼보려 했다.
이제훈 영화를 보는 행위를 걷어내고 보니 음악이 남더라. 사실 악기도 못 다루고 노래도 잘 못하는데 배우를 안 했으면 뭘 했을 거냐는 질문에 당당하게 뮤지션이라고 말했다. (웃음) 일상에서 나를 촘촘하게 채워주는 시간은 음악을 들을 때다. 지치고 힘들 때 그저 듣는 행위만으로 나를 위로하는 존재를 직접 만든다면 정말 대단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