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의 원래 제목은 “the tyranny of merit”이다. 메리토크라시라는 단어는 많은 철학 용어가 그렇듯이, 정말 어렵다. ‘메리트’라는 단어가 어렵고, 그 단어가 약간의 추가적 능력 때문에 너무 많은 보상을 받는다는 뜻을 함유하는 메리토크라시, 능력주의로 전환되는 과정도 어렵다. 직관적으로 알기가 어렵고, 단어가 사용되는 21세기 자본주의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이해가 될 수 있는 말이다. 80년대 레이건 정부의 감세 정책 이후 빈부 격차가 늘어나면서 최고위층 엘리트들의 소득은 높아졌다. 그런 걸 비판하면서 나온 용어다. 잘났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돈을 너무 많이 받잖아? 이런 어감이다.
미국의 빈부 문제와 80년대 이후의 감세를 가장 많이 지적한 사람 중 하나가 노벨경제학상을 탄 폴 크루그먼이다. 메리트라는 단어가 ‘공정’이라고 번역된 것은 순전히 한국적 맥락이다. 실제 마이클 샌델은 책에서 공정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하지 않는다. 정의(justice)와 능력주의, 이런 얘기만 하는데 우리는 그걸 우리 식으로 ‘공정’이라고 자체 번역해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공정’에 대한 최근의 용법으로는 ‘공정’ 무역이나 ‘공정’ 관광이 있다. 소비자들이 조금 더 많은 돈을 지불하거나 불편을 감소하더라도, 제3세계의 생산자를 조금 더 돕거나 현지인들에게 불편을 덜 끼치자는 걸 의미한다. 1981년에 생겨난 공정거래위원회의 ‘공정’과 ‘공정’ 무역에서의 공정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는 조금 다르다. 물론 영어로는 똑같이 ‘fair trade’이다.
개념이야 뭐든 무슨 상관이랴! 한국에서의 공정은 결국 내가 했던 노력의 대가를 부당하게 빼앗아가지 말라는 “나만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개인적이고 파편주의적인 능력주의의 의미를 더 많이 가지게 된 것 같다. 한국 자본주의는 확실히 위기로 넘어가는 것 같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만 악에서 구하소서”, 이렇게 외치면서 공동체의 위기는 점점 더 ‘남의 위기’로 여겨진다. 에밀 뒤르켐은 노동 분업이 사회를 ‘유기적 연대’로 만들어준다고 했다. 정의론이 한국에 와서 ‘공정’으로 바뀌더니, 결국 나를 위한 주기도문이 되었다. 파편화된 개인들이 과연 연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