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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트' 이정재 감독, “후회없이 쏟아부었다”
송경원 사진 백종헌 2022-08-10

단언컨대 성공적인 연출 데뷔작이다. 배우 이정재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연기와 연출은 엄연히 다른 분야라 그의 첫 연출 데뷔작에 쏟아진 기대에는 일말의 의심이 섞여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베일을 벗은 감독 이정재는 실로 놀라운 결과물을 보여준다. 극 전체를 조망하는 기획자의 시선. 자기 결정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되새김질하는 연출자로서의 태도. 그리고 여전히 좋은 배우. <헌트>에서는 여러 역할을 맡았지만 결국엔 이정재라는 대명사로 수렴된다. 배우 출신 감독이란 수식어는 거추장스럽다. 어떤 역할을 수행하건 그저 영화인 이정재의 차기작이 벌써 기다려질 따름이다.

- 칸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를 했다. 칸에서의 반응과 국내 시사 후의 반응이 달랐나.

= 차이가 꽤 있다고 느낀다. 칸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서 공개한 이후 다양한 반응이 나왔는데 아쉬움을 표하는 분들도 있었다. 국내 시사를 통해 미리 본 분들이 남긴 댓글이나 SNS 반응을 보니 “왜 호불호가 갈렸는지 이해가 된다”라는 얘기가 제일 많았다. 대체로 “아쉽다는 해외평에도 불구하고 나는 재미있게 봤다”라는 반응이었다. 잘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칸에서는 지역색이 진하고 배경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반, 정치색이나 지역색 관계없이 스파이물로서 각자의 신념이 충돌하는 과정만 따라가도 흥미롭다는 이야기가 반이었다.

- 1980년대 한국 배경의 첩보물은 의외로 드물다.

=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라는 특수 상황을 소재로 한 만큼 지역색이 짙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해외 관객도 이해하면서 함께 볼 수 있는 영화가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했다. 딱히 해외 관객이 아니더라도 국내의 어린 관객, 그 시대를 지나오지 않은 친구들이 볼 때도 이해할 수 있길 바랐다. 만약 한국 초등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다면 배경지식이 없는 해외 관객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 거기에 기준을 두고 시나리오를 각색했다. 그럼에도 칸에서 호불호가 나뉜 반응을 보면서 깨닫는 바가 많다. 관객과의 소통에 대한 고민은 아무리 해도 모자란다.

- 다행히 국내 관객은 감독의 의도처럼 맥락을 잘 이해하고 몰입하는 듯하다. 칸 버전과 달라진 부분이 있나.

= 몇몇 부분을 덜어내고 정리했다. 예를 들면 장영자가 언급되는 부분은 거의 삭제했다. 잘 모르는 분들도 많고 전체 흐름에 꼭 필요하지 않아서. 유재명 배우가 나오는 목성사 관련 부분도 한쪽으로 다 몰아서 김정도 파트를 좀더 쉽게 정리했다.

- ‘남산’이라는 시나리오의 판권을 구입하면서 <헌트>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직접 연출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었나.

= 처음 버전에서 지금까지 얼마나 고쳤는지 모른다. 세는 것도 잊을 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전체를 다 뒤집는 것만 해도 8번째 버전까지 있는데 각 시퀀스의 세부 디테일이나 설정 등 가지를 쳐나가며 바뀐 게 더 많다. 내 기억에 4번째 원고가 나왔을 때 지금의 인물 구도로 가닥이 잡히면서 이 정도면 영화화를 해볼 수 있겠다는 전체적인 틀이 잡혔던 것 같다. 원래는 박평호 시점의 이야기였는데 김정도 분량이 늘어나면서 투톱 구조의 흑과 백이 역전되는 구성이 완성됐다. 사실 처음엔 주변의 만류도 적지 않았다. 80년대가 민감한 시대이기도 하고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데다 해외 촬영도 필요했기에 규모가 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연출을 잘해줄 연출자를 찾아 맡기려 했는데 이야기가 다듬어지는 과정에서 누구보다 내가 이 이야기를 잘 이해하게 됐고 결국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마음먹었다.

- 정우성 배우는 시나리오를 네번이나 고사했다고 하던데.

= 정우성 배우가 중간에 피드백을 많이 줬다. 처음 80년대 스파이물이라는 컨셉을 들었을 때 응원도 많이 해주었고. 원래 정지우 감독님께 연출을 부탁하려 했을 때 평호 역에 최민식 선배를 염두에 두기도 했다. 내가 연출을 맡는 것이 결정되고 계속 시나리오를 고치는 과정에서 인물관계가 전면 수정되었다. 유정(고윤정)은 김정도의 가족 같은 존재가 되었고 방주경(전혜진)의 분량이 대폭 늘었고 장철성(허성태)이 새롭게 탄생했다. 무엇보다 안기부 내부 갈등과 팀 대 팀의 구도가 완성됐다. 고전 스파이물 중에 참고한 건 없는지 질문도 많이 받았는데 레퍼런스가 되었던 작품은 거의 없다. 애초에 주제를 세우고 인물을 탐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구도가 완성된 형태다. 지난 프리프로덕션은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배우와 제작 전반은 물론 스스로를 설득하는 시간이었다. 결국 정우성 배우도 지금의 시나리오에 납득한 뒤 기꺼이 무게를 함께 짊어지기로 했다.

- 제작, 연출, 주연까지 맡았다. 쉽지 않은 도전이지만 세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기에 가능한 것도 있을 듯하다.

= 애초에 제작을 염두에 둔 작품이라 프로듀서의 시선으로 출발하는 부분이 있다. 프로듀서는 시나리오를 볼 때 이게 가능한 이야기인지, 예산에 대한 측정, 관객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등을 고려해 시나리오에 반영한다. 가령 원래는 스위스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있었는데 최종적으로 일본으로 수정되었다. 아웅산도 실제 지역으로 특정하고 싶지 않아 태국으로 바꾸었다. 일본과 태국 분량은 각각 부산과 강원도 고성에서 찍었는데 미술과 세트로 현지처럼 보일 수 있도록 그림을 계산하여 시나리오와 콘티를 짰다. 일본 시퀀스는 택시 등 차량을 일본에서 공수해와서 사실성을 더했고 태국 분량은 고성 산 중턱 완만한 경사의 공터를 평탄화 작업하고, 야자수를 심고, 아스팔트를 깐 후 건물을 지었다. 마지막 하이라이트인 만큼 가장 많은 예산과 시간이 투입된 시퀀스다. 충분한 볼거리와 리얼리티, 생동감과 제작 현실을 함께 고민하지만 결국 제일 중요한 건 다시 돌아와 시나리오, 좋은 이야기다.

- 125분에 달하는 상영시간에도 중간에 쉴 틈이 거의 없다. 빠른 호흡으로 몰아가는데도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 놀랍다.

= 125분이 길다니 무슨 말씀인지. 아마 올여름 영화 중 가장 짧지 않을까 싶은데. (웃음) 처음부터 속도에 신경을 많이 썼다. 스파이물이 대부분 느리지 않나. 심리적인 묘사나 내적 갈등을 파고드는 부분도 필요하고 멋진 분위기를 위한 이미지 숏이 들어가다 보니 템포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다만 지금 관객이 그런 호흡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결국 좀더 빠른 호흡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동시에 긴박감과 밀도를 떨어뜨리지 않는 방식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 그 해결법 중 하나가 액션 시퀀스의 다이내믹한 구성이다. 초반부터 강렬한 액션이 나오는데 뒤로 가도 다채로운 액션들이 선사하는 충격의 강도가 줄어들지 않는다.

= 감사하다. 미국에서 대통령 암살 시도가 일어나는 오프닝 시퀀스는 <헌트>가 어떤 영화인지 인장을 찍어주는 장면이다. 당시 실제로 전두환 대통령이 미국 순방길에 올랐을 때 교민들의 시위가 곳곳에서 있었다는 자료를 뒤늦게 찾은 뒤에 그걸 바탕으로 발전시킨 장면이다. 칸에서 그 시퀀스가 끝나고 타이틀이 뜰 때 관객이 박수를 치더라. 신기한 기분이었다. 액션이 점점 강력해져야 하는데 물리적인 한계가 있으니 다양한 방식의 액션으로 설계를 했다. 예를 들면 도쿄의 총격 신은 시가전의 특징을 살려 볼거리를 풍성하게 만드는 식이다. 무엇보다 액션 신들을 길게 늘릴 생각이 없었다. 짧고 간결하고 집중력 있게 터트리는 게 중요했다. 중반부 김정도의 세탁소 습격 신은 같은 총격 신이라도 폭탄을 터트리는 방법 등 재밌는 아이디어를 추가했고 짧지만 강렬하게 인상을 남길 수 있도록 했다. 후반부에 가면 이정재, 정우성의 주먹다짐을 보고 싶어 하는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게끔 맨몸 액션을 넣었다. 합을 맞춘 정교한 격투라기보다는 정말 힘과 힘이 부딪치는 박력 있는 장면을 원했다.

- 박평호와 김정도는 다른 듯 보이지만 적대적인 환경 한가운데 투신하여 끝내 믿는 바를 관철한다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 서로를 의심하는 두 사람이 매직미러를 사이에 두고 취조를 벌이는 장면이 있다. 그때 상대를 보고 자백하라고 취조하지만 화면에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고백하는 것처럼 나온다.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은 거기서부터 서서히 같은 방향으로 돌진한다. <헌트>는 흑에서 백이 되고, 백에서 흑이 된 두 남자가 종국에는 회색지대에서 만나는 이야기다. 계단에서 한 몸뚱이가 되어 뒹구는 두 사람의 액션은 그래서 필요했다. 태국에서의 대규모 폭파 장면도 그래서 중요하고. 모두가 회색 빛 먼지를 뒤집어쓴 이미지가 중요했다. 특수효과 감독님도 자기가 이제껏 해본 폭파 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하셨다. 장르적인 쾌감과 보는 즐거움은 언제나 중요하지만 액션 하나도 그저 멋지기만 한 볼거리로 소비하고 싶진 않았다.

- 고문 장면이 다소 과하다는 의견도 있는데.

= 그럴까. 모르겠다. 폭력을 미화하거나 가학적으로 묘사한 적은 없다. 오히려 현실이 훨씬 잔인했지만 자제해서 표현했다. 그 시대에 고통받고 희생당한 분들을 생각하면 한참 모자란다고 생각한다. 그 끔찍한 고통을 일부나마 전달하기에 꼭 필요한 최소한이었다.

- 거울 이미지 이야기를 하니 타이틀도 의미심장하다. 헌트(HUNT)의 N을 거꾸로 뒤집어 썼는데.

= 문득 N이 하나의 기호처럼 보였다. 박평호와 김정도, 두개의 기둥이 있고 대각선 하나가 그 사이를 잇는다. 근데 우리 영화는 점점 빠르게 상승하는 구조라 N을 뒤집어보면 의미도 일치하고 느낌을 더 살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영화 중간에 나오는 암호문처럼 영화 속 기호를 놓고 관객이 해석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초고는 ‘남산’이라는 제목처럼 안기부 내 조직의 충성 경쟁에 대한 내용이라 바뀐 이야기에 맞는 제목이 필요했다. 극중 ‘베드로 사냥’이 중요한 코드이기 때문에 ‘사냥’이라는 키워드를 따와 <헌트>라고 제목을 정했다. 누가 누구를 왜 사냥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로 봐줘도 좋겠다.

- 실제 있었던 사건과 각색을 절묘하게 오간다. 상상력으로 이뤄진 부분도 많고 리얼리티에 충실한 부분도 눈에 띈다. 둘 사이의 밸런스를 어떻게 조율해나갔나.

= 솔직히 80년대는 다루기 까다로운 시기라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주변에서 만류하기도 했고. 하지만 주제를 드러내는 데 80년대만큼 적절한 시기도 없었다. 메시지를 앞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를 원했다. 예전에 그림 그리는 분과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분이 이렇게 얘기했다. 어떻게 그리느냐보다 때론 어떤 재료로 그림을 그리느냐가 곧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고. 워낙 인상적인 말이라 오래 기억에 남았다. 어쩌면 이번 영화의 방향은 몇 가지 단순한 의문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요즘 뉴스를 보면 국민들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이야기가 자주 들려온다. 남녀, 세대, 정치색 등 각자의 차이로 나뉜 채 적과 아군, 이분법적으로 사고한다. 가족끼리 정치 이야기도 못 꺼낼 정도다. 단순한 이념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누가 우리를 이렇게 가르고 있고 왜 이렇게 한쪽 면만 바라보고 있는지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그걸 드러내는 데 80년대만큼 효과적인 시대도 드문 것 같다.

- 정도에 따라선 역사를 재현했다기보다는 현재를 반영한 거울과 은유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핵심적인 인물 중 하나가 박평호의 지인인 유정이다.

= 다시 말하지만 메시지를 앞세우고 싶진 않다. 다만 그렇게 읽어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이다. 평호 곁에 있다가 거대한 사건에 휘말리는 대학생 유정은 젊은 세대를 대변한다. 유정은 평호에게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 멍청해”라고 말한다. 엔딩에서 평호가 이에 대해 뒤늦은 응답 같은 대사를 하는데 그게 감독으로서 관객에게 건네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이번 엔딩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여러분의 해석도 궁금하다.

- 또 재미있었던 게 카메오 찾기다. 황정민, 이성민, 주지훈, 김남길 등 수많은 배우들이 기꺼이 함께해주었다. 벌써부터 n차 관람 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로 ‘김남길 찾기’를 꼽는 관객도 있다.

= 김남길 배우는 정말 분장을 잘했다. 존재 자체로 80년대다. 워낙 많은 분들이 기꺼이 함께해주겠다고 해서 감독으로서 행복한 고민이었다. 자칫 배우들에게 시선을 뺏길 수도 있기에 가능한 초반에 몰아서 배치할 필요가 있었고 원래부터 비중 있는 배역으로 정해진 황정민, 이성민 배우를 제외하곤 죄송하게도 일본 시퀀스의 해외파견팀으로 다 몰아넣었다. (웃음) 세 가지 차원의 응원이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함께한 동료에게 보내는 응원. <태양은 없다> 이후 26년 만에 만나는 이정재, 정우성을 향한 응원. 마지막으로 배우 출신 감독의 도전에 대한 응원. 해외에는 작품성과 흥행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작품이 꽤 있지만 한국에서는 드무니까. 그 응원을 받아 성공적인 사례로 기억되고 싶다.

- 감독으로서 차기작 계획은 있나.

= <헌트>는 기획에서 완성까지 5년 반 정도가 걸렸다. 적당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번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 배우로서 <대립군>, <신과 함께> 두편, 드라마 <보좌관>, <오징어 게임> <사바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등 7편에 출연했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서 만들었다. 작은 대사 하나도 의미 없이 흘려보내지 않고 모두 연결되어 있는 영화다. 어떻게 봐주실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후회는 없다. 차기작은 생각도 안 해봤다. 너무 힘들어서 어쩌면 아예 없을지도 모르겠다.

- 워낙 성공적인 연출 데뷔라 하고 싶지 않아도 마음대로 안될 것 같다.

= 제발. 나는 연기가 더 많이 하고 싶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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