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호의 얼굴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이자 소시민을 보여주는 메타포다. 관객 역시 동시대 한국을 다룬 영화에 송강호가 나올 때 그 지점을 기대한다. <비상선언>의 인호는 비행기 테러범을 쫓는 형사팀장이자 비행기에 탄 아내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내던지는 남편으로서 관객이 가장 이입하며 볼 수 있는 캐릭터다. 여기에 송강호가 주로 표현해왔던 부성애 대신 부부애가 두드러지고, 현장에 개입하지 못하는 단절감이 극적인 감정을 끌어낸다는 점에서 또 다른 평범성을 완성시킨다.

- 한재림 감독과 세 작품을 함께했다. (장편영화 주연 기준으로) 5편을 함께한 김지운 감독과 4편을 함께한 봉준호 감독에는 못 미치지만 박찬욱 감독과는 타이 기록이다. (웃음) <우아한 세계> 때도 시놉시스만 보고 출연을 결정했다고 들었는데, 감독에 대한 신뢰가 상당한 것 같다.

= 정확히는 시놉시스가 아니라 밥 먹으면서 줄거리를 들은 게 전부였다. 한창 <괴물>을 찍고 있을 때 만났는데, 나보다 8살 어리지만 영화를 해석하는 안목이 남다른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비상선언>은 한재림 감독에게 먼저 이야기를 들은 후 <기생충>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시나리오를 받았다. 장르적으로는 재난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소재를 뛰어넘어 우리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었다. 사회 공동체, 주변의 시선, 가족의 소중한 가치 등 관객 개개인에 따라 <비상선언>이 비추는 자화상도 다양하다. 그런 점에서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시나리오였다.

- 한재림 감독은 과거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비상선언>의 태도를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비교한 적이 있다. 봉준호 영화에서 송강호는 평범한 소시민이었다가 극적인 사건에 원치 않게 휘말린다. 연기한 입장에서도 유사점을 느꼈나.

= 사실 인호 캐릭터에서 <괴물>의 강두를 떠올린 적은 없는데 지금 질문을 들으니 비슷한 점도 있겠다. 하지만 연기할 때 <괴물>과 <비상선언>을 함께 생각하진 않았다. 가족을 구하려는 절박한 심정은 유사할 수 있지만 인호는 강두보다 훨씬 똑똑하다. (웃음) 나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다.

- 인호는 재난이 벌어지는 비행기에 타지 않는다. 비행기 세트에서 어떻게 촬영이 진행되고 있는지, 이병헌, 김남길, 임시완 등 다른 배우들이 어떻게 연기하고 있는지 육안으로 보지 못한 상태에서 연기해야 했다.

= 인호를 비롯한 지상의 인물들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기차는 멈출 수 있고 배는 정박시킬 수 있지만, 하늘을 나는 비행기는 불가항력적이다. 기본적으로 인호는 직업의식이 투철한 형사이기 때문에 처음 제보를 받았을 때부터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선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우왕좌왕하며 어쩌지 못한다. 만약 아내가 비행기에 타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매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게 인간이다. 그렇게 인호의 머릿속에서 일종의 아노미 현상이 일어난다. 재난을 막고자 애쓰는 인호 캐릭터가 우리 마음을 대변함으로써 재난을 뛰어넘는 인간을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랐다.

- 그동안 사건의 한복판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안내자 역할을 많이 했다. <비상선언> 역시 자연스럽게 인호를 따라가며 보게 된다. 차이가 있다면 그가 핵심 사건인 재난에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 촬영도 내가 먼저 했다. 지상 장면부터 찍고, 비행기 세트 장면을 찍고, 마무리를 함께했다. 그래서 더욱 막연했다. 비행기 신 촬영을 먼저 봤다면 심리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비행기를 타본 사람이라면 예측할 수 있는 범주 안에 있는 재난이기 때문에 적절한 선을 찾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이성과 감정이 충돌되는 지점을 절묘하게 표현하기 위해 스스로도 검수를 많이 했고 최종적으로 감독과 의견을 교환했다.

- 대체로 송강호에게는 지켜야 하는 자식이 있었다. <괴물> <우아한 세계> <설국열차>에서는 딸, <효자동 이발사> <관상>에서는 아들과의 관계가 중요했다. 그리고 대부분 아내 없이 혼자 애를 키운다. <비상선언>에서는 그 역할을 이병헌이 대신한다. (웃음)

= (웃음을 터뜨리며) 그래서 아주 신선했다. 맨날 자식을 향한 부성애만 보여주다가 모처럼 아내를 사랑하는 연기를 하게 됐으니. 원래 한국의 중년 남자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오히려 표현을 잘 못한다. 그러다 위기 상황이 닥치면 보여주지 못했던 감정을 드러내게 된다. 아마 이 부분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 <살인의 추억> <하울링> 이후 오랜만에 형사로 나온다. 한국 남자배우들이 가장 많이 연기하는 캐릭터임에도 의외로 형사 역을 자주 맡지는 않았다. 10년 만에 형사 캐릭터를 선택한 건 어떤 믿음이 있어서일 텐데.

= 솔직히 말하면 <살인의 추억> 이후 형사 역이 들어오면 다 거절했다. <살인의 추억>의 상징성이 너무 강하기도 했고, 내게 들어오는 역할의 80% 이상이 형사였기 때문이다. <살인의 추억>의 두만은 형사라는 점이 중요했고 11년 전에 촬영했던 <하울링> 역시 비슷한 궤를 갖고 있다면, <비상선언>의 형사는 좀 다르다. 그냥 경찰에서 근무하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인호는 형사라는 사실보다 가족을 지켜야 하는 한국의 중년 남자를 대변하는 데 초점이 있다.

- 극중 인호는 어떤 선택을 한다. 모든 이가 내릴 수 있는 결단은 아니다. 인호는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이후 배우가 보여주는 연기도 강도가 높다.

= 영화적으로 허용되는 지점이 아닐까. 그렇다면 실제 영화에서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얼마든지 가능한 선택이 아닐까 싶다. 막바지에 몰린 중년 남자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표현의 정도에 대해선 고민이 많았다. 너무 덜어내면 극적인 효과가 떨어지고 과잉이 돼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시각적이든 청각적이든 고통이 느껴지는 쪽이었으면 좋겠다고 나도 감독도 결론내렸다.

- <변호인> <밀정> <택시운전사> <마약왕>은 송강호의 캐릭터가 곧 영화 제목인 작품들이었다. 반면 <기생충> <브로커> <비상선언> 등 최근 출연작들은 대체로 배우들의 앙상블이 돋보인다.

= 이른바 원톱 영화를 하다가 앙상블이 중심인 작품을 찍을 때 오는 신선함은 있지만, 최근 들어 일부러 작품을 그렇게 선택한 것은 아니다. 배우 입장에서는 둘 다 힘들다. 타이틀롤은 혼자 끌고 가면서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지만, 앙상블 연기라고 해서 쉬운 것만은 또 아니다. 후자가 쉬는 날이 많아서 육체적으로 수월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웃음)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으니 쉬고 있어도 쉬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앙상블은 작품에서 복무해야 하는 지점을 정확히 지배하는 고난도의 연기를 요구한다. 타인을 지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영화에서 그 배우가 해줘야 하는 역할을 정확히 해줘야 한다.

- 프리프로덕션만 총 1년, 그중 6개월을 촬영 콘티 짜는 데 할애했을 만큼 사전 준비가 철저했다. 완벽히 짜여져 있는 상황에서 연기한다는 건 배우에게 어떤 경험이었나.

= 감독이 아무리 완벽한 그림을 준비하더라도 결국 연기는 다른 사람이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이다. 테두리는 미리 짤 수 있어도 그 안의 소프트웨어는 배우의 고유한 영역으로 남는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을 배우가 온전히 채워나갈 때 부담감과 즐거움이 동시에 온다.

- 마지막 장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할 것 같다.

= 관객마다 결말을 다르게 받아들일 것이다. 한재림 감독도 이를 의도하고 만들지 않았을까. 분명하게 규정되는 엔딩이 주는 영화적 체험과 카타르시스도 분명 있겠지만 <비상선언>의 목적은 그게 아닌 것 같다.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쪽이 우리가 지금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회 현실에 더 가깝다. 그런 지점에서 정말 훌륭한 엔딩이다.

- <비상선언>의 테러범 진석을 연기한 임시완을 극찬했다. <밀정> <택시운전사>에 함께 출연한 엄태구도 자주 칭찬하지 않았나. 그래서 궁금해졌다. 송강호는 어떤 후배들에게 호감을 갖는 걸까. (웃음) 단지 그들이 연기를 잘한다는 이유 하나만은 아닐 것 같은데.

= 나는 함께하는 모든 배우들에게 호감이 간다. (웃음)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예뻐할 수밖에 없다. 그건 인지상정이다. 그렇다면 배우가 연기를 못한다고 미운가, 그건 또 아니다. 연기는 누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배우가 잘하는 건 100% 그 사람의 재능이다. 그래서 후배들을 존중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한다. 배우들은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을 때 굉장히 고무되는데, 그렇다고 거짓으로 칭찬할 수는 없다. 그거야말로 나쁜 일이다. 칭찬하고 싶을 때 일부러 하지 않는 것 또한 나쁘다. 칭찬은 아낌없이 해야 한다. 그래서 어제도 오늘 아침에도 시완이에게 이번 연기가 정말 좋았다는 문자를 보냈다.

- 올해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끊임없이 예의 주시하고 격려하고 때로는 질타하는 한국 관객” 덕분에 한국 콘텐츠가 다양하고 역동적이라는 말을 전했다. 지난달 <브로커>에 이어 <비상선언>까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더욱 까다롭게 소비를 결정하는 관객을 만나게 됐다.

= 결과는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다. 결과가 좋다면 물론 기쁘겠지만, 미진하다고 해서 실패작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중요한 건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최선을 다했느냐다. 지난 3년간 <비상선언>의 제작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 우리의 노력과 열정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어떤 척도로 평가하든 결과는 그다음 문제다. 결과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겠지만 모든 스탭과 배우들이 최선을 다했다는 점은 자부하고 있다.

- <1승>과 <거미집> 촬영을 마쳤다.

= 두 작품 모두 내년에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신연식 감독의 <1승>은 재미있는 소재로 만든 아주 밝고 소프트한 영화다. <거미집>은 신연식 감독이 쓴 초고를 김지운 감독이 각색하면서 영화가 많이 달라졌다. 아주 새로운 작품이라 상당히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