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쉼톡-단점뿐이라고? 개성으로 빚자! 반전매력 현봉식' 설치기사 연수원 상황극서 진상고객 연기 배우의 꿈
“네 얼굴에?” 모두 반대할 때 “보여주겠다” 오기
외모 편견에 단역 알바도 쫓겨났던 시절 거쳐 데뷔 4년 만에 ‘노안+사투리’ 봉식표 캐릭터 완성
“잘 할 수 있는 걸 밀고 나가세요”
현봉식은 노안, 사투리 등 남들이 지적하던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빚었다. 그러면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개성있는 배우가 됐다. 그는 “남들보다 부족해 보이면 어떤가. 나만의 것을 찾으면 된다”고 말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저를요? 이 일을 우짜면 좋노.” 넷플릭스 드라마 <디피>(D.P.)를 보고 그를 좋아하게 됐다는 한 팬의 마음을 전해 주자, 배우 현봉식(38)이 안타까운 듯 말했다. <디피>에서 그가 맡은 헌병대장 ‘천용덕’은 병사를 소모품 취급하는 악역이다. 캐릭터만 봐서는 도저히 마음을 줄 수 없는 인물이다. “제가 얄미운 역할을 많이 맡았고, 작품에서 비중도 작고. 특히 <디피>는 군부대에서 악행을 벌이니, 시청자들이 절 좋아해 줄 거란 기대를 안 했지예.”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오시엔)에서 고시원에 사는 조직폭력배를 사실적으로 연기해 팬이 됐다며, ‘한술 더 뜨는’ 이들도 있다. “거참, 이상하지예.” 고개는 갸웃하는데, 입꼬리는 자꾸 올라간다.
현봉식은 2014년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으로 데뷔한 뒤, 빠르게 ‘악역의 세계’를 평정했다. 영화 <아수라> <1987> <낙원의 밤>을 비롯해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 <청일전자 미쓰리>(티브이엔)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특히, 그는 작품들을 통해 빌런(악당)의 공식을 바꿨다. 과격한 행동이나 걸걸한 목소리 없이도 조곤조곤 말하며 섬뜩한 악인의 모습을 표현한다. 현봉식만의 ‘빌런 맛’을 느낄 수 있는 장면 하나.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에서 판사가 “이 자리에 선 이유”를 묻자 현봉식은 리듬을 타듯이 다정하게 답한다. “가정폭력이요~.”
이런 현봉식의 연기를 두고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한국방송2)에서 떡집 주인으로 출연한 배우 김미화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인물이 된다”고 표현했다.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이 쉼을 찾기 시작하는 7월에, 현봉식을 ‘쉼톡’ 주인공으로 초대한 이유. 그가 배우의 꿈을 이룬 과정에는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전하는 또렷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 도전하기에 앞서 “네가 무슨…”이라는 말에 좌절한 청춘들에게 현봉식의 지난 시간은 또 다른 길을 보여 줄 것도 같다. ‘뭐든 남들만큼, 남들처럼 해야 하는 걸까?’ ‘내게 주어진 것은 왜 이것뿐인가?’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현봉식의 지난 인생이 전하는 위로는 이렇다. “남보다 부족해 보이는 그것이 어쩌면 내게 더 많은 것을 줄 수도 있다”고.
■ 네 얼굴에 무슨 연기? 보여드리겠습니다!
“네 얼굴에 무슨!” ‘배우를 하겠다’는 말에 그가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자매품으로 ‘네 주제에’, ‘네 나이에’도 있어요.(웃음)” 그는 초등학생 때 유도를 시작해, 고등학생 때 부상을 입은 뒤 그만뒀다. 이후 7년 가까이 돈만 좇아 닥치는 대로 일했다. 피시(PC)방 아르바이트, 택배기사, 화물차 운전 등등. “당시에는 꿈도 미래도 없었어요. 뭐든 6개월 이상 한 일도 없었고.” 스물여섯살에 에어컨 설치기사로 일하다가 고객 응대 상황극에 참여하면서 배우를 꿈꾸게 됐다. “당시 진상 고객 역할을 맡았는데, 연기해서 밥 먹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어머니마저 만류할 정도로 그의 꿈은 인정받지 못했다. 서울에서 연기 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조출연 아르바이트를 갔더니 스태프가 무섭게 생겼다며 돌려보냈고, 데뷔하고 나서는 첫 대사였던 ‘차 빼’를 연거푸 실수해 옆에서 지켜보던 상인한테 ‘니가 무슨 배우냐, 내가 너보다 낫겠다’는 질타도 받았다. 이 정도면 멘털이 무너질 법도 한데, 현봉식은 “그런 소리를 들을수록 오기가 생겼다”고 한다. “여러 사람이 자꾸 ‘넌 안 된다’고 하니까 ‘너희가 몰라서 그래. 되나 안 되나 보자’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내가 어때서! 나도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 주먹 불끈 쥐게 되고.(웃음)” 그는 “내가 무엇이 안 되는지 잘 알아보고 실수하고 온 날은 잘못된 것을 하나하나 제거해나갔다”고 말했다. 같은 꿈을 꾸는 배우들과 스터디를 하고 프로필을 만들어 영화사에 돌리는 등 열심히 뛰어다녔다. 대사 변경 등 현장에서 벌어지는 돌발 상황에 대비해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담력도 키워나갔다. 그런 노력 덕분일까, 데뷔 전 “네 나이에 1년만 버텨도 박수 쳐 주겠다”던 연기 강사가 데뷔 후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잘하더라”고 칭찬해 줬다고 한다.
■ 노안이라고요? 경쟁력입니다
연기야 노력하면 는다지만, 외모가 주는 배우 특유의 느낌은 어떻게 바꿔야 하나. 그래서 내가 필요한 곳을 어떻게 찾아가야 하나. 그런 면에서 현봉식은 영리한 배우다. 그는 “네 얼굴에”라는 ‘지적’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그 안에서 자신의 특징을 찾아 개성으로 빚었다. 남들은 단점이라고 말하는 ‘노안’을 장점으로 활용해 연기 스펙트럼을 넓혔다. 그는 2014년 30살에 데뷔해 30~50대까지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영화 <1987>이다. 그를 배우로 각인시킨 이 작품에서 그가 맡은 캐릭터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에 가담한 50대 인물 박원택 계장이다. 노안이 아니었다면 맡을 수 없는 역할이다. 그는 “얼굴 덕분에 이 나이대에 할 수 없는 역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라고 말했다. “이창희 감독이 영화 <사라진 밤>에서 50대 인물을 맡긴 게 미안해서” 그를 대중적으로 알린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에 캐스팅하는 등 ‘노안’은 그에게 또 다른 기회도 가져다줬다. 그의 얼굴은 영화계에서도 오랜만에 등장한 개성 있는 캐릭터였다. 그가 영화 <극비수사>에 캐스팅될 수 있었던 것도 얼굴 덕분이다. 곽경택 감독은 오디션장에서 그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체 어디 있다가 나타났느냐!” 그래서일까, 그는 데뷔 이후 거의 매년 작품에 출연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지난해만 출연작이 다섯편이다. 그의 이름 석 자가 젊은 세대 사이에서 화제를 모은 것도 인터넷에서 ‘노안 배우’로 지목되면서부터다. “지금은 20대 역할 제안도 들어와요. 실제 저처럼 젊은데 노안이어서 오해받는 캐릭터. 노안이라고 해도 괜찮아요 사실이니까.(웃음) 전 고등학교 때부터 이 얼굴이었어요. 아무래도 노안은 저의 경쟁력인가 봐요.”
■ 표준어? 사투리로 하겠습니다!
사투리도 현봉식의 전매특허처럼 여겨진다. 그는 작품 대부분에서 사투리를 썼다. 한 작품을 제외하고는 표준어로 된 대사를 그가 직접 사투리로 바꿔 사용했다. 지역에서 서울로 온 배우 지망생이 첫번째 교정하는 것은 사투리를 포함한 발음이다. 표준어를 사용해야 다양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봉식은 사투리를 자신의 개성으로 만들었다. “저도 처음에는 표준어로 오디션을 봤는데, 다 떨어졌어요. 제가 아무리 열심히 교정해도 어설픈 건 어쩔 수 없잖아요. 그래서 사투리로 더 잘하자고 생각했어요. 오디션을 볼 때마다 먼저 저는 사투리 연기가 더 강점이라고 말씀드렸어요. 무조건 표준어로만 하라면 오디션을 못 보는 것이고, 표준어를 한 뒤에 사투리로 바꿔서 해보라고 기회를 주셔서 자연스럽게 풀 수 있으면 캐스팅되곤 했어요.” 험상궂은(?) 외모에 사투리가 더해져서 초반에는 거친 인물을 많이 맡았다. 하지만 같은 악역이라도 작품마다 뚜렷하게 구분되는 인물로 빚어낸 그의 노력은 서서히 사람들의 선입견을 깨나갔다. 그는 드라마 <하이에나>(에스비에스)에서 사투리를 사용하는 엘리트 변호사를 연기했다. 드라마에서는 드문 캐릭터다. 남들이 말했던 “그 얼굴, 그 목소리로 뭘 하겠냐”던 그는 데뷔 후 8년이 지난 지금 조폭부터 변호사까지 다채로운 인물을 만들어 가고 있다. 연기할 때 무표정에서는 드러나지 않다가, 예능프로그램이나 일상에서 웃을 때 확연하게 눈에 띄는 덧니도 현봉식의 배우관을 보여준다. 배우들은 대개 미관상 이를 교정하는 편인데, 그는 자신의 캐릭터에 맞게 덧니를 그냥 뒀다. 주로 거친 인물을 연기하기에 너무 정갈한 치아도 캐릭터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서다. 이 덧니는 다른 악역 배우들과 달리 그를 돋보이게 하는 장치다. 그의 팬들은 “폭력배 역할을 도맡는 배우가 덧니를 드러내며 순둥이처럼 웃는 모습에서 반전 매력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의 인기가 급상승한 시점도 그가 지난해 <라디오 스타>에 출연해 수줍음 많은 평소 모습을 보인 뒤부터다.
대중적 인지도를 높여준 <타인은 지옥이다>. 오시엔 제공
■ 현봉식이 꿈 잃은 청춘들에게
그는 술을 못 마신다. “술자리가 생기면 콜라랑 사이다랑 9 대 1로 섞어서 맥주 색깔 만들어 앞에 두고 있어요.” 원래 이름은 ‘현보람.’ 친구들이 자꾸 놀려서 초등학교 들어갈 때 ‘현재영’으로 개명했다. 예명인 현봉식은 “아버지 같은 카리스마에 삼촌처럼 잡기에 능했으면 해서, 두분 이름에서 한 자씩 따서” 지었다. 유명해지고 난 뒤에도 자신에 대해 숨기는 게 없다. 군 복무 시절, 고등학교 시절 ‘흑역사’ 사진을 친구들이 보내주면 스스로 소셜미디어에 올린다. 자존감이 높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이 자존감이 그 힘들었을 시간을 헤쳐나가게 한 원동력은 아닐까. 꿈이 없던 20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선택을 해야 했던 때를 통과한 그에게 지금 좌절하고 고민하는 청년들을 향한 한마디를 부탁했다. “아이고, 제가 무슨 할 말이 있냐”며 손사래를 쳤지만, 직접 겪고 헤쳐나온 그의 진심은 다른 성공한 이들의 말보다 더 와닿을 것 같았다.
“전 20대 때, 어른들이 ‘꿈을 갖고 열심히 살아야지 왜 그렇게 사느냐’고 말하는 게 싫었어요. 뭔가를 꾸준히 해온 이들은 꿈을 꿀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이들은 그럴 수가 없잖아요. 저 역시도 꿈도 희망도 없는 20대를 지내왔고, 운 좋게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 생겼고, 이런저런 일이 겹치면서 마음먹게 됐고. 그러면서 느꼈어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살다 보면 어떤 것을 마음먹게 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그 순간에는 결정하고 뛰어가야 한다는 것을요. 그러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것보다 잘하는 걸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요. 이젠 뭐든 열심히 해도 잘 안 되는 시대잖아요. 그러니 잘 하는 걸 해야 좀 더 좋은 결과물을 얻지 않을까, 하는 현실적인 생각. 그러니 어른들이 주변 시선 의식하며 잘하는 걸 못하게 막지는 말았으면 해요. 저도 잘하는 게임을 계속했다면 프로게이머가 됐을 수도 있잖아요. 네일아트를 배울 때도 그랬어요. ‘니 얼굴 보고 누가 네일아트를 받으러 오겠냐’고 다들 말렸죠. 근데 더 잘됐을지도 모르죠.(웃음) 생각해보면 내 꿈은 있었는데 늘 방해받았던 것 같아요.” 현봉식이 배우가 된 이후부터 놓치지 않는 꿈은 “엔딩 자막에 내 이름이 계속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에 절대 욕심내지 말자고 다짐해요. 욕심내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지니까. 작품과 상대 배우를 위해서 나를 사용할 줄 아는 배우가 되도록 노력하고 싶어요.”
한겨레 남지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