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즈 라이트이어>가 돌아보는 시네마의 시간에 대하여.
1995년, 앤디는 버즈 라이트이어라는 장난감을 생일 선물로 받았다. 뿅뽀롱뿅뿅~ 번쩍번쩍하는 제법 근사한 장난감이었다. 구닥다리 카우보이 봉제인형인 우디와는 비교도 안된다. 물론 이 둘은 <You’ve Got a Friend in Me>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멋진 듀오가 된다. <토이 스토리>는 1995년, 100주년 생일을 맞은 시네마에 뜻밖의 선물처럼 등장했다. 아니, 선물이라기보다는 두 번째 세기를 맞이하는 시네마에 주어진 새로운 육신과도 같았다. 시네마는 셀룰로이드 필름이라는 봉제인형의 몸에서 디지털이라는 플라이스틱 보디로 갈아타야 할 시간이었다. <토이 스토리>는 영화 탄생 100주년에 맞춰 등장한 첫 번째 장편 디지털 영화였다. 당시 관객에게 ‘과연 우디와 버즈 라이트이어처럼 시네마도 과거의 필름과 미래의 디지털이 훌륭한 팀워크를 이룰 수 있는가?’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그리고 픽사라는 애송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제법 야심찬 첫 번째 장편애니메이션이기도 했다. 이번 <버즈 라이트이어>에는 단짝 우디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버즈 라이트이어도 장난감이 아니다. 오롯이 버즈 라이트이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다. 우주의 어느 지점에서, 약간 복잡한 시간대에서 펼쳐진다. 현재의 지구가 뭔 상관이람.
SF 장르에 대한 덕후력 테스트?
설정상 <버즈 라이트이어>는 <토이 스토리>의 앤디가 좋아하는 SF의 주인공 캐릭터다. 우리가 보는 <버즈 라이트이어> 역시 앤디가 즐겨 보는 바로 그 SF라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시작한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버즈 라이트이어>의 이야기는 여러 겹과 갈래를 이루고 심지어 뒤엉켜 보일 때가 있다. 우선 여기서 다루는 버즈 라이트이어는 <토이 스토리>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평행 세계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것일까, 또는 우주 저 먼 곳, 말하자면 420만 광년 떨어진 곳에 있으면서 언젠가는(그게 미래일까, 과거일까) 지구로 도달하는 것일까. 아니면 버즈 라이트이어라는 캐릭터가, 앤디가 좋아하는 SF 이야기의 주인공 캐릭터라는 <토이 스토리> 본편의 설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까. 물론 앞으로 지켜봐야 어느 정도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또 다른 층위는 주제 설정과 장르 진행에 걸쳐 있다. 어찌 보면 <버즈 라이트이어>의 전반부는 전체 이야기의 설정에 할애되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나 긴 장편 시리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우주 전사가 어떻게 우주적 시간의 굴레(그러니까 상대성 이론이 상정하는 그런 시간, ‘내게는 순간인데, 저들에게는 영겁과도 같은 시간’)에 갇히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시간 설정에 대한 오리엔테이션(관객의 설득, 납득, 이해, 수긍 등등) 작업이 끝나면, 버즈 라이트이어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후반전에 뛰어든다. 정체불명의 외계 침략자에 맞서는 모험담 말이다. 전반부에 흥미를 느끼든 후반부에 더 관심이 쏠리든,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이전까지의 SF영화들에 대한 끊임없는 인용과 차용, 오마주와 변용, 때로는 패러디이다. SF 장르에 대한 덕후력 테스트처럼, 해당 장르에 친숙할수록 <버즈 라이트이어>는 그만큼의 풍성함으로 이야기를 부풀려간다. 이를테면, <인터스텔라>는 마치 작품 전체의 이론적 토대를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끔 이끄는 선행학습과 같은 역할을 하고(따라서 버즈의 시간 굴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마션>은 불시착한 행성에 어떻게 정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존 필드 매뉴얼을 제공한다(마찬가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물론 <스타워즈> 시리즈에 대한 사전 지식은 더 물을 필요도 없다. <버즈 라이트이어>의 속편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힌트도 어쩌면 그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면에서 깨어난 캡틴 아메리카처럼
수많은 참고 작품들과 이미지, 이야기, 설정들 속에서도 굳건히 유지되는 것은 결국 ‘시간’에 대한 물음이다. 물론 이 ‘시간’은 그저 물리학적 시간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상영관에서 최신 물리학 강의 동영상을 접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작품에서 다뤄지는 시간은 기실 <토이 스토리> 전체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 근사하게 풀어본다면 ‘시간이 흘러가면서 의미는 어떻게 변하는가?’라는 문장으로 쓸 수 있겠고, 조금 더 단순한 단어로 대체하자면 ‘유효기간’이 적합할 것이다. 더이상 의미가 없는 장난감은 폐기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동료일지라도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았다면, 둘 사이의 관계에서 각자가 갖는 의미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수차례의 비행 시도가 실패에 그치며 버즈가 직면한 가장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변화의 충격은 바로 단짝인 알리샤의 노화다. 어딘가 익숙한 설정 아닌가? 그렇다, 버즈의 목소리는 크리스 에반스가 맡았다. 캡틴 아메리카가 긴 동면에서 깨어났을 때 겪는 바로 그 경험이다. 이처럼 영화를 보는 관객이, 장난감을 갖고 노는 아이가 겪는 시간 경험이라는 것은 그렇게 자신의 속도를 따라 흘러간다.
불편해지는 것은 그 흐름에서 이탈한 시간대이다. 봉인된 시간, 혹은 멈춘 시간, 노화가 유예된 시간 등등. 이런 시간은 하이퍼 스피드로 날아가는 우주선, 프로그래밍된 기능을 반복하는 로봇, 그리고 플라스틱 소재로 만들어진 장난감에 의해 구현된다. 장난감이 아닌 버즈 라이트이어에게 이 작품은 삭스라는 로봇 고양이를 선사한다. 그리고 이 삭스 또한 보안 유지를 위해 폐기되어야 하는 지경에 빠지기도 한다. 우주선, 로봇, 장난감에 덧붙여 시네마라는 장치 자체가 우리의 시간 경험을 바꿔왔다. 애초에 에디슨이 자신의 방식으로 키네토스코프라는 활동사진 장치를 발명했을 때, 그는 호기롭게도 “이미 세상을 떠난 뮤지션들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언제든 소환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에디슨의 전망은 약 125년 후에 의도치 않게 문자 그대로 실현되기도 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봉쇄된 공연장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축적한 아카이브 영상을 통해 과거의 오페라 가수들을 되살렸다). 이는 알리샤가 버즈에게 등장하는 방법이다. 영상으로 저장된 삶의 순간이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버즈에게 당도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처럼 <토이 스토리>와 <버즈 라이트이어>는 시간이라는 주제 속에서 꾸준히 시네마를 되짚고 돌아본다. 영화 이전의 움직임 재현 장치들을 괜히 광학적 장난감, 또는 철학적 장난감이라고 부른 게 아니다. 아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