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TV프로그램 중 기억에 남는 것에 <서울국제가요제>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황당한 내용이었는데 미국이나 영국의 팝송이 거의 외국 유행 음악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시절에 프랑스나 이탈리아부터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가수들까지 등장해 노래 경연대회를 여는 방식이었다. 물론 각자의 국가에서는 유명했을지 모르지만 국내에서는 거의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세계 각국 가수들의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굉장히 특이한 경험이었다. 그때 들었던 노래 대부분은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그중 수상후보작에도 못 오른 이탈리아 가수가 부른 ‘스파게티 카넬로니 피자…’라고 부르는 노래는 그 장단의 흥겨움 때문이었는지 아직까지도 가끔씩 흥얼거리며 부르고 있다. 이처럼 특별히 주목받은 것도 아닌데 오랫동안 기억이 남는 작품 가운데 하나가 한 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본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라는 단편 작품이다.
자유분방한 표현방식이 시도되는 단편애니메이션 상영작 속에서 거의 상업용 재패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깔끔하면서도 세밀한 배경과 그림체는 오히려 신선감을 주었다. 그러나 작품을 보는 동안 느껴지는 분위기는 기존 상업애니와는 명확하게 구분되었는데 캐릭터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오는 대신 계절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는 시간 속에 쓸쓸한 여자주인공(끝내 얼굴은 안 나온다)이 버려진 고양이와의 만남을 통해 조금씩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가는 섬세한 감정의 흐름은 백마디의 말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이미지의 파워를 여실히 보여준 작품이었다.
단편애니메이션을 만들고 나서 그 작품에 참여한 거의 모든 스탭이 감독이라는 직함을 붙이는 경우도 본 적이 있지만 이 작품을 만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음향이나 더빙을 제외하고는 혼자서 원화, 동화, 2D, 3D 등의 모든 작업을 다해내는 작가로 유명하다. 올해 5월4일부터 열리는 서울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SIAF)를 비롯해 각종 애니메이션영화제나 디지털영상제에서 상영될 신카이 감독의 <별의 속삭임>(The voice of a distant star, 2002)은 2D/3D 풀디지털로 제작된 25분짜리 애니메이션으로 이전과 마찬가지로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감독 자신이 약 2년의 제작기간을 들여 전 제작과정을 담당한 작품이다.
스토리나 기초설정은 일본 가이낙스사 작품의 패러디처럼 느껴질 정도로 차용이 많은데 비유적으로 잠깐 서술해보면 2039년 화성으로 향하던 유인 탐사팀이 타르시스대지에서 외계문명의 유적을 발견한 직후 외계생명체의 습격을 받으며 시작된다.(건버스터+나데시코) ‘타르시안’'이라 칭해진 이 외계생명체에 대적하기 위하여 국제연합우주군함대가 결성된다. 일본 관동지방에 살고 있는 중학교 3학년생인 미카코(<그남자 그여자>의 유키노 역)는 여름을 맞아 동급생 남자친구인 노보루(<그남자 그여자>의 아리마 역)에게 국제연합군의 우주로봇 파일럿으로 뽑혔다는 얘기를 한 뒤 우주로 향한다. 시리우스로 워프하기 직전 보낸 미카코의 휴대폰 메일이 노보루에 닿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일년, 메일 속에는 ‘ 자기 일을 잊어버리지 않았는지에 대한 걱정이 담겨져 있다’. 시리우스에서 타리시안의 정신공격을 받으며 적들을 쓰러뜨리는 미카코(이젠 <에바>의 아스카)는 노보루에게 도착하는 데 8년 넘게 걸리는 휴대폰 메일을 보낸다.
일본의 대표적인 상업애니메이션에서 많은 부분 차용된 흔적이 역력하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거의 혼자서 만들었다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고퀄리티 화면과 현란한 3D액션, 이전의 단편에서도 보여준 심도있으면서도 뭐가 애절함을 느끼게 해주는 배경, 그리고 무엇보다 휴대폰 메일을 통해 전해지는 이 두 남녀의 10년에 걸친 외로움과 애정의 마음이 25분이라는 시간 동안 담겨져 있어 최근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좀처럼 느끼기 힘든 감상의 여운을 느끼게 해준다.
매킨토시 1대로 작업한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인력이나 시스템, 자금, 시간 등이 부족하는 말로 작품의 떨어지는 질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를 느끼게 해준다. 부디 신카이 감독과 같은 작가들이 많이 나와 ‘패스트 푸드’보다는 ‘별미’ 같은 맛이 나는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김세준/ 만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