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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사 <세계도해대백과사전>
2002-04-18

그림에 침을 흘리다

고1 때 청계천 헌 책방 거리를 자전거 타고 쏘다니며 ‘나까마’(이 책방에서 구입한 책을 저 책방에 팔며 차액을 남기는 짓) 노릇을 꽤 열심히 했던 탓에 지금도 종로통 같은데 드문드문 남아 있는 헌 책방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헌 책방에는 이른바 ‘원서’들도 있다. <펜트하우스> <플레이보이>가 주종이지만 그 속에 미국에서도 구하기 힘든 흑인운동 관련, 아메리카 인디언 관련 책들도 ‘폐기처분’ 도장이 찍힌 채 섞여 있다. 이런 책들을 어떻게 싸게 사느냐. 우선 <펜트하우스>를 ‘주요하게’ 들고 ‘관련’ 책들을 ‘아무렇지 않게’ 든다. 그리고 하나씩 내밀며 “얼마요?” 하고 묻는다. 주인은 <펜트하우스>에 눈을 반짝이며 “2천원”, 그리고 나머지 책은 흥미없다는 듯 “한꺼번에 천원” 그런다. 그러면 나는 <펜트하우스>를 도로 꼽고 나머지 책값을 지불하고 나온다. 물론 그것도 옛날이다. 청계전 헌 책방들은 일제시대 때 출간된 문학작품 희귀본을 횡재하는 재미가 있었지만, 요즘 헌 책방들은 참고서나 만화, 외국어 사전이 기본이고 두툼한 부피에 특이한 내용에 값도 꽤 괜찮다 싶은 화집 혹은 자료집들은 사다놓아도 별 쓸모가 없다. 화집은 화질이 너무 떨어지고 자료집은 인터넷 정보 수준을 못 따라가는 까닭이다. 일반 백과사전 역시 옛것이 새것에 미치지 못한다. 국어사전도 마찬가지. 문학-예술사전은 문학-예술인들의 명함판 사진투성이거나 내용이 좀 실할 경우 외국 것을 그대로 베낀 경우가 대부분이니 원전을 보는게 낫다.

그런데 딱 하나 예외가 바로 도해사전이다. 도해사전은 번역이 불가능한 까닭이다. 한국의 건축의 대청구조를 그려놓고 고미다락, 붙장, 걸쇠, 잡을 끈, 되창문, 덧문, 머름 등등으로 설명하는 책을 어떻게, 아니 뭐하러 번역해 ‘오겠’는가.

1982년간. 인쇄는 조잡하고 분류법은 엉성하고 오자-탈자투성이지만 깨알 같은 글씨와 그림 1200쪽으로 건축, 인체, 복식, 가구, 기구, 기계악기, 민속, 성구, 육상 교통기관, 우상 숭배, 차량, 선박, 비행기, 전차, 병기, 궁복, 체육, 레크레이션, 동물, 새, 식물 등을 한국 위주로 망라한 이 ‘강력한’ 책은 초판으로 절판되었다.

망했을 거야…. 이 책을 한때 ‘비치’해놓았던 사무실에 놀러온 소설가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하나같이 이 책에 침을 흘리다가, ‘나도 한권’ 하는 마음에 출판사를 뒤적이다가, 출판사 이름이 아무래도 낯선 것에 체념하듯 뱉은 말이다. 소설가 침흘리는 사전 내고 흥한 출판사,없나?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