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생각나지 않지만 어린 시절 분명, 무엇인가 내 옆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형상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토토로를 두고 했던 말이다. 어릴 적 그렇게 대단하게 보였던 것들이 지금은 초라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무엇인가’의 존재로 설명하는 그 마음이 와닿아서, 박제처럼만 생각됐던 이 사람의 가치를 비로소 실감했었다.
‘2002 KBSTV 애니메이션 기획안 공모’에 선정된 26부작 코믹 판타지 <꼬마 여우 요랑>은 각자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일단, 가지각색의 밝고 예쁜 색깔이 마음을 환하게 만든다. 주인공은 분홍빛 여우, 요랑이다. 천상의 서고지기였던 요랑은 누구도 못 말리는 장난꾸러기. 결국 귀중한 책을 지상으로 떨어뜨리고, 그 벌로 천년 안에 책을 찾아오라는 벌을 받는다. 지상으로 쫓겨온 요랑은 그러나 빈둥거리며 999년의 시간을 보낸다. 남은 시간은 고작 1년. 그러나 도무지 책을 찾을 가능성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 무렵 요랑이 살고 있는 여우골로 전학온 또 다른 주인공이 있었으니, 엄마를 잃고 외롭게 살아가는 아홉살 소년 현이다. 뒷산에서 우연히 만난 소년에게 고집스러운 여우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지만, 갖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우정을 쌓게 된다. 여기에 현의 주변 인물들과 천상족들이 가세하면서 갖가지 사건은 벌어지는데, 스물넷에 이르는 서브 캐릭터야말로 놓칠 수 없는 재미를 던져준다. 항상 졸린 꾸미, 부끄럼 많아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팅, 예언이 떠오르면 눈을 번쩍 뜨는 수리옹, 참견꾼 투룰루, 겁이 많은 불빛 고양이 초리, 족장 여우 소소, 악동 여우 일당 등등, 수많은 인간 군상이 여기에 있다. 미소녀도 등장한다. 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요린이다. 그런데, 자신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이 소녀가 사실은 요랑이라는 것을 현이는 언제 알게 될까.
<꼬마 여우 요랑>에는 현란하고 밝은 색깔만큼이나 다양한 캐릭터와 마법 아이템이 등장한다. 귀여운 천상족은 물론 이들이 지니고 있는 ‘마법의 봉’ 종류만 해도 장난이 아니다. 한국에도 소개된 바 있는 <꼬마 마법사 레미>가 캐릭터 상품으로 일본에서 거둬들인 수입이 만만치 않았던 것을 떠올리면, 여자 어린이를 타깃으로 노린 흔치 않은 시도는 무모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서울무비는 이번에 기획 초기단계부터 철저하게 머천다이징에 포커스를 맞췄다. 창작으로 수익 모델을 창출하겠다는 본격적인 의지인 셈이다. 올 겨울 방영을 목표로 잡고 있으며, 데모 영상은 이미 나왔다. 이 작품은 2000년 춘천애니타운 프로젝트 프로모션에서 대상을, 2001년 SICAF SPP 신작기획공모전에서 서울특별시장상을 수상한 바 있다. 오랜 시간 투자한 만큼 설정이 탄탄한 것은 물론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검정 먼댕이가 자주 출현하는 것처럼 <꼬마 여우 요랑>에도 2000년 방영됐던 <보리와 짜구>의 짜구가 등장, 스탭들의 자취를 남긴 점도 눈길을 끈다. 현이와 요랑이 친해지는 과정에서는 어린 왕자와 여우, 요랑이 변신하는 모습에서는 구미호 설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본격적으로 제작이 진행되면서 다소 바뀌는 부분은 있겠지만, 천상족이 인간계에서 벌이는 소동과 예쁘고 밝은 색감은 변하지 않을 듯하다.
현이와 요랑이의 우정은 이야기의 열쇠인 동시에, 우리가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무엇인가’에 대해 또다시 생각할 기회를 준다. 무엇이었을까. 누구였을까. 어릴 적 그토록 따뜻하고 환상적인 세계를 만들어 준 것은…. 으,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
김일림/ 월간 <뉴타입> 기자 ill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