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작업을 하는 공간은 두 군데다. 아들 두놈에게 일찌감치 안방을 헌납하고 아내와 내가 공용 침실-거실 겸 서재로 챙긴 마루(덕분에 우리 집은 애들이 조용한 편이다)와 역삼동 소재 한국문학학교 사무실이 그것.
마루에는 책상을 조합하여 평균치의 3배는 족히 되는 면적을 확보했다. 그리고 벽 2면을 사전류와 CD로 채워놓았다. 학교 사무실 책상 면적도 2배는 된다. 옛날에는 글을 쓰다 말고 후배들과 회의를 해야 하는 일이 많았지만 변변한 공간이 없어서 조태일(시인, 작고)과 김주영(소설가)의 공간을 솔찮은 세월 동안 빌려썼었다.
얼굴이 꾀죄죄해서 ‘공간 없는’ 태가 나는지 내게 ‘책상 하나 주마’고 이기웅(열화당 사장)과 정병규(디자이너)도 호의를 베풀었었다. 그래서 이리 뒤늦게 면적 욕심이 큰 건가.
그렇단들, 참고서적이 아무리 좋아도 두권을 사서 한 군데씩 비치할 돈 능력은 아직도 안 되는 셈인데, 웬일로, 위 책은 가장 가까운 곳에 세권이나 있다. 1994년 9월30일 재판3쇄, 누계8쇄 발행. 정가, 4500원.
싸서 산 건가? 그럴 리야 없다. 1994년이면 <상상하는 한국사>를 쓸 땐데, 그래서? 그건 조금 말이 된다. 나는 기존의 한국사 책들이 내적으로 시간적 논리-순서 맥락이 없고, 외적으로 세계사적 시야가 없는 것에 거의 격분하여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런 ‘화급’보다 더 급하고 본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때 나는 ‘역사라는 실체’가 내 손가락 사이로 무산되는 듯한 혼미상태를 겪으면서 그 혼미를 막연히 새로운 의미의 구멍으로 전화시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때,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노이로제를 일으키기 일쑤였던 그 ‘세계사연표’가 오히려 마지막 지푸라기처럼 느껴졌고, 때마침 입수한 역민사 <세계사연표>가 실로 적절한 기억의 씨줄과 날줄을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그렇다. 2년 전 인터넷을 알고부터 ‘세계사년표’를 더욱 풍성하게 작성하려는 노력이 인터넷 작업의 1/3을 차지했지만 그 요란하고 화려한, 또한 풍성한 인터넷 연표들을 아무리 조합해도 위 책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다. 위 책은 정말 적절하게, 입체적으로 세계의 진보와 발전을 그리고 발전의 위험을 ‘느끼는’ 씨줄-날줄 역할을 아직도 하고 있다. 차라리 이걸 원본으로 모조리 링크를 시켜봐?
96쪽이지만 분량은 단행본 300쪽이 넘겠는데, 아직도 4500원인가. 아니, 망했을지도.(역민사 펴냄)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u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