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계에서 원작자나 감독, 디자이너가 엔터테이너가 아닌 ‘작가’로 대접받는 건 더이상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데 최근 특이하게 애니메이션 제작관계자가 아닌 원작자가 ‘작가’로서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바로 <은하철도999>와 <우주전함 야마토>의 원작자인 마쓰모토 레이지이다. 한국에서야 <마징가Z>나 <들장미 소녀 캔디>, <미래소년 코난>과 같이 한 시대를 산 어린이(뿐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작품 반열에 있는 그의 작품이 새삼 일본이나 해외에서 주목받는 것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은하철도999>와 <캡틴 하록> <퀸 에메랄다스>와 같은 작품의 캐릭터들이 상호 연관되는 스토리를 추가시키면서 하나의 거대한 우주 서사시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역사적 줄기를 만들어놓고 사건을 배치하는 <기동전사 건담>과 같은 역사성을 가지는 시리즈물이 없진 않다. 또 <마징거Z 대 데빌맨>처럼 다른 작품의 주인공들이 카메오식으로 출현하는 경우도 종종 있긴 하지만, 한명의 만화가가 자신이 그린 작품들을 연결해 하나의 세계로 통합하려는 시도는 흔치 않은 일이다.
80년대 초 <안녕 은하철도999>(81년)나 <캡틴 하록>의 극장판 <나의 청춘 알카디아호>(82년)에서 자신이 펼쳐놓은 작품들 속의 의문점과 연결점을 찾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90년대 말부터 연이어 나온 <은하철도 999 이터널 판타지>(98년), <퀸 에메랄다스> OVA(98년), <하록 사가>(2000년), <메텔 레전드>(2000년/2001년)로 이어지는 애니메이션들에서 마쓰모토 레이지는 그의 작품에서 끊어져 있던 많은 부분들을 채워넣고 있다.
최근 2부작으로 제작된 OVA <메텔 레전드>는 스토리전개가 허술하고 산만한 느낌이 드는 데다가 자주 등장하는 ‘재활용 컷’이 전반적인 감상에 장애가 되긴 하지만, 최근작이라 작화의 질은 괜찮은 편이다. TV에서는 외화의 키스 신도 삭제당하던 시절, ‘요술공주 밍키’와 더불어 여성의 나체를 등장시켜 어린 시절 충격적(?) 기억으로 남아 있으며 당시로서 드문 타입의 성인형 캐릭터였던 ‘메텔’의 어릴 적 모습을 볼 수 있고, ‘기계백작’과 함께 최고의 악역이었던 ‘프로메슘’ 여왕이 어떻게 그런 캐릭터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마쓰모토 레이지의 팬이라면 거쳐야 될 작품이다.
인간의 ‘의지’와 ‘존엄성’에 상반되는 ‘권력’과 ‘기계문명’ 그리고 ‘인간성 상실’의 기호로 쓰였던 기계인간의 출발점이 식량, 자원의 부족과 혹독한 기후에 시달리는 국민들을 살리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스토리는 단순히 ‘영원한 쾌락’을 좇기 위한 것으로 비춰지던 기계인간 설정보다는 훨씬 현실적으로 와닿는다. 한낱 기계부속처럼 취급받으며 반강제적으로 기계인간이 되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기계인간이 돼버린 인간의 혼들을 마치 포도주처럼 기계인간이 마시는 장면을 보면 얼마 전 뉴스에 나온 일본의 한 전자쇼의 인간형 로봇처럼 섬뜩한 기분이 든다.
작품 한편이 흥행하지 못한다고 유행하는 스타일로 전업(?)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된다. 한 작품을 몇십년씩 그리라던가 자신의 모든 작품을 연관성 있게 만들라는 부탁은 아니지만, 부디 자신들의 작품에 애정을 가지고 일부의 사람들에게라도 강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메텔 레젠드>는 총 2부작으로 출시된 이후 최근 미국판과 일본에서 박스판으로 재출시됐다. 김세준/ 만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neoeva@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