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에서 30대 남성들에게 <로보트태권V>는 유년 시절을 상징하는 추억의 대명사인 것은 분명하다. 지구에 내습하는 사악한 적들을 맞아 목숨을 걸고 지구의 운명을 건 싸움을 하는 거대한 강철 로봇이나, 정의로운 주인공 훈이의 확고한 사명감, 탁월한 태권도 솜씨, 적의 거대한 로봇까지도 꼼짝 못하게 만드는 깡통로봇의 고춧가루탄은 당대의 정서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게임기도, 컴퓨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서울의 뒷골목에서 우리는 <로보트태권V>의 주제가를 부르며, 힘과 정의에 대한 내성을 키워갔었다.
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을 다한다는 무시무시한 맹세를 자연스럽게 욀 수 있었던 까닭도 어쩌면 이 거대한 로봇과 그 조종사들이 보여준 ‘충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로보트태권V>에 대한 소식들을 들을 때면 조국근대화와 총력안보와 같은 지난 시대의 단어가 떠올랐다.
강하다, 신파의 힘
<로보트태권V>는 70년대에 유년 시절을 보낸 소년들의 꿈이며, 그 꿈을 추억하는 사나이의 로망이다. 일본의 거대 로봇물에 뿌리를 둔 <로보트태권V>는 한국의 관객과 독자의 기호를 고려한 ‘70년대 한국판 거대 로봇물’이었다. <로보트태권V>가 효과적으로 당대의 관객과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신파의 힘이다. 대중가요로 비유하자면, 꺾임이 사용된 친숙한 멜로디, 샘플링으로 만들어진 랩 댄스, 사랑한다는 애절한 가사와 같은 것들이다.
관객과 독자의 반복체험에 기초한 신파는 <로보트태권V>에서는 주로 악인들을 통해 구현된다. <로보트태권V> 1탄에서 카프 박사가 만든 인조인간 메리는 처음에는 악역이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인간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다. 이번에 만화로 출간된 <로보트태권V> 우주작전에서 메리의 역할은 알파별의 핑크빛 인종 피코가 맡았다. 로봇소년군단 부군단장이라는 주요 직책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지구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괴로워하다 결국 알파별을 파괴하고 지구를 지키고 자신은 죽고 만다. 지구인의 눈에서 보자면 그의 희생이 정의로운 일이지만 이성적으로 납득하기는 어렵다. 단지 자기의 먼 선조가 지구에 와 잉카문명을 건설하고 지구인들과 혼인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인류와 문명을 모조리 파괴한다는 줄거리는 이성과 논리, 타당성보다 앞선 감성의 영역, 즉 신파의 영역이다.
이처럼 <로보트태권V>는 지구를 파괴하려는 악한은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모조리 없애야 한다는 선악의 논리를 신파의 힘을 이용해 밀어붙인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논리와 이성을 기대하지 않는다. <로보트태권V>는 이성과 논리보다는 신파와 열혈로 삶을 불태웠던 과거의 만화다.
1976년도의 만화이지만 3권을 읽는 데 지루함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카프 박사의 붉은 제국(책에는 말콤의 흑색 제국이라고 나오는데, 말콤은 카프 박사가 조정하던 로봇이었다)을 무찌르고 평화를 찾은 지구에 낯선 혜성이 돌진한다. 이 혜성을 주정뱅이 오 박사가 처음 발견하고 지구 종말을 경고한다. 혜성이 점차 다가오자 지구는 일대 혼란에 빠지고 만다. 로켓을 발사해보기도 하지만 혜성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파괴당한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지구의 종말. 로보트태권V가 출격해보지만 뾰족한 답이 없다.
지구를 멸망시키기 위해 다가오는 혜성이라는 아이디어는 할리우드보다 먼저 사용된 신선한 것이며, 알파별의 인종 중 평화적인 핑크빛 인종이 지구의 잉카문명을 건설했다는 설정도 나쁘지 않다. 애니메이션보다 더 화려하고 디테일한 로봇의 태권 액션도 매력적이다. 게다가 악역으로 등장하는 녹의 여왕은 한국SF를 개척한 산호의 <라이파이>에 등장하는 악당 캐릭터였다. 한국만화에서 보기 드문 선배작가에 대한 오마주다.
전통을 복원하는 첫걸음
<로보트태권V> 시리즈는 김형배, 차성진, 한재규 등이 작화를 맡았다. 그중 제일 많은 작품을 그린 작가는 김형배다. 김형배는 <로보트태권V>를 통해 SF장르의 문을 연 뒤 (1978) 등의 작품으로 SF작가의 입지를 확고하게 했다. 김형배의 여러 <로보트태권V> 시리즈가 있지만, 이번에 출판된 작품은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만화로 각색한 <로보트태권V> ‘우주작전편’이다.
기호의 문제겠지만,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세대라면 구태여 <로보트태권V>에서 현란한 연출이나 세련된 작화 스타일을 기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안에는 한때 우리가 열광했던 감성이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보는 재미는 충분하다. 필름 하나 남아 있지 않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던 <로보트태권V>, 그리고 고물상으로 팔려나가 우리 곁에서 사라진 우리나라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열악함이 21세기 들어 서서히 극복되고 있어 반갑다. 이 책 역시 사라진 전통을 복원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