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희는 30년 경력의 사진기자다. 그에게 사진 취재를 당한 적이 한번 있는데, 어찌나 집요하고 주문이 많은지, 화를 내기 직전까지 갔었다. 작가를 배우 취급하다니…. ‘배우’가 ‘작가’보다 낮은 직업이라는 게 아니라, 각기 할 일이 다르다는 뜻으로 나는 발끈했었다. 뭐, 그렇단들, 시‘창작’과 시‘낭독’은 다르다고 아무리 주장한들 축시나 추도시, 기념시를 쓰고나면 어쩔 수 없이 식장에서 읽을밖에 없었던 경험을 숱하게 갖고 있는 나로서야 취재를 거부할 용기는 애당초 없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그가 찍은 나의 사진을 보니 정말 ‘나에게 예술적’이다. 그의 흔적은 전혀 없고 내가 나에게 나의 풍경을 전달해온다. 대단하다, 참. 당신의 이런 면을 찍은 사진기자 혹은 작가는 없었는데…. 마누라도 영 신기한 모양인지 자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찍은 문인 일흔일곱명의 사진을 모아 얼마 전 책을 냈다. 책 제목은 (과연) ‘作家 일흔 일곱의 풍경’인데, ‘박경리에서 김영하에 이르는’ 시인, 소설가들의 얼굴과 그 표정의 주변을 담은 사진들은 참으로 기묘한 매력을 발한다.
그것은 작가 내면의 풍경화라는 말로 매우 부족하다. 풍경의. 분위기가 아스라이 흩어질 듯하면서도 ‘풍경 자체의 깊이’를 심화시키는데, 마치 작가의 글쓰기와 맞먹는 ‘사진 쓰기’를, 그것도 글-시간적인 매력을 능가하는 사진-공간적으로 펼치는 속으로 내가 빨려가듯, 그렇게 (나의 혹은 사진 주인공의)글-사진 쓰기와 회오리 바람으로 아니면 격렬한 섹스로 뒤섞여드는 듯하다. 남녀노소 불문이고 미추 불문인 그 ‘합쳐짐의 혼미한 감격’ 어디쯤에서 ‘문학-예술 궁극의 목표는 성(性)의 극복’이라는 명제가 완성될 듯, 아니 이미 오래 전에 완성된 듯싶다.
77명 중에 반은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고 반의반은 대충 아는 사람, 나머지는 모르는 사람들이다. ‘잘 아는’ 경우 낯익음이 와락 징허게 밀려오는데 그게 언뜻 낯설지만 그것을 압도하며 감동적이다. ‘대충 아는’ 경우 대충 안다는 사실이 죄송할 정도로 뭔가 뿌듯한 ‘노역의 기쁨’이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밀려든다. ‘모르는’ 경우는? 낯섦이 편안하다. 아주 오래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것을 나는 ‘오래된, 다정한 모뉴멘털리티’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그러나 압권은 공지영과 조경란의 사진, 여성문학이 한때의 유행이나 ‘베스트셀러물’이 아니라 간고하고 따듯한, 헐벗고 풍성한 존재의 한 본질이라는 점을 이토록 극명하게 표현한 ‘논문’을 난 본 적이 없다. 덤으로, 황지우 글도 근래 드믄 명문.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n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