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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잔 더 드릴까요? <카페 알파>
2002-03-28

anivision

상업애니메이션,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소비자(시청자)의 시선과 관심을 얻어내기 위해 전개속도나 이미지의 전환이 매우 빠른 작품이 주류다. 15분에서 5분 정도에 한 에피소드가 끝나는 경우가 많다보니 스토리는 더욱 가팔라지게 마련이다. 이렇다보니 많은 애니메이션들이 캐릭터의 매력에 의존한 코믹물이나 현란한 액션이 가미된 로봇 및 SF물로 제작되고 있다.

‘멸망해가는 고도 문명사회’와 ‘여자 로봇’이라는 소재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아마도 시로 마사무네의 <공각 기동대>나 <애플시드> 같은 액션물이나 <메트로폴리스>나 <로봇 카니발> 같은 문명비판적인 SF판타지물이 되는 것이 기본일 것이다. 하지만 아시나노 히토시의 원작만화 <요코하마 쇼핑 기행>(국내 소개명 <카페 알파>)을 바탕으로 제작된 동명 애니메이션에서는 이 두 가지 요소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총격신이나 격투신이 등장하지 않는다.

‘조용히 종말해가는 세상’으로 표현된, 점점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일본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상상되는 파괴된 거대한 마천루 숲이나 각종 기계의 잔해들의 모습이 아닌 한적한 시골 풍경 그대로. 주인공인 로봇 ‘알파’ 역시 엄청난 괴력을 지녔다든지 눈에서 광선이 나오는 이미지가 아니라, 커피와 물고기장식은 좋아하지만 육류나 우유는 못 먹고 가끔 추억에 울고 웃는 지극히 ‘인간’다운 모습으로 나온다. 알파는 주인이 멀리 여행을 떠나버려 혼자서 자신과 똑같은 이름을 지닌 카페를 지킨다. 카페는 몇 안 되는 동네사람들 이외에는 거의 손님이 없는 한적한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알파는 가끔씩 스쿠터를 타고 동네 근처를 돌아다니거나 생필품을 사러 인근 시장에 가는 것 외에는 원두를 갈아 자신이 마시는 커피를 만드는 게 일이다(이 카페에서 만들어지는 커피의 80%는 알파가 마신다).

1번째 에피소드인 ‘오전2/2’와 2번째 에피소드인 ‘오후1/1’에서 약 20분간 벌어지는 스토리라고 해봤자, 코코네라는 로봇이 중간중간 차를 얻어 타면서 카페를 찾아와 주인의 메시지와 선물을 전해주고는 다시 만날 약속을 하며 떠난다는 평이한 얘기다. 5번째 에피소드인 ‘바람이 불고 있다’에서는 아침에 일어나 마실 커피 타기 위한 준비를 하다가 밤이 되면서 밤바다의 파도소리를 즐긴다는 스토리가 전부. 도저히 상업용 애니메이션이 될 것 같지 않지만, 이 작품을 보다보면 여러 가지 복선과 사고로 어렵게 설명하려던 사람과 사람간의 ‘만남’이나 ‘정’, 그리고 최근 들어서 애니메이션상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여유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비록 저예산으로 만들어져 원작의 유려한 풍경이나 여유로운 인물선을 100% 즐기지는 못하지만, 파란 하늘 위로 조용히 흘러가는 구름을 안으며 발길 닿는 데로 스쿠터를 몰고가는 ‘알파’의 모습이나 일본의 유명한 듀엣 기타리스트인 ‘GONTITI’가 프로듀싱한 맑은 배경음악은 원작 팬들이 이 작품에 가지는 애정을 한층 더 높여주는 요소가 되고 있다.

‘알파’가 ‘로봇’으로 설정된 이유는, 바로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과 느릿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여유’와 ‘약속’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마감에 쫓기는 작가나 기자에게 ‘여유’를 가지라고 하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단 몇분, 몇초조차도 참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현대의 생활 속에서 한순간만이라도 하늘을 보고 심호흡을 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세상의 사고의 절반 이상은 줄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보다보면 그 캐릭터나 장면이 오래 남는 경우는 있어도 장소에 대한 집착은 별로 느끼지 않는 편이지만, ‘카페 알파’는 가능하다면 꼭 한번 방문해 그날의 유일한 손님이 되고 싶다. 김세준/ 만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neoeva@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