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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마 키요히코의 <아즈망가 대왕>
2002-03-28

엽기적이지 않아서 튀는 그녀들

저기 한 무리의 여고생들이 다가온다. 그들은 누구인가? 지난 몇년간 일본과 한국 어디에서나 가장 강력한 문화 소비자, 새로운 취향의 생산자로 군림해온 존재들이다. 삐삐, 핸드폰, 스티커 사진기, DDR과 펌프…. 무엇이 뜰 것인지 아닌지는 그녀들에게 물어봐야 했다. 대중 음악과 만화에서도 그들은 최강의 소비자로 위용을 떨쳐왔다. 오빠 부대와 동인지 패러디 만화가 그 대표적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 많은 꽃미남들에 질렸는지, 이제 그녀들이 스스로 주인공으로 나서기로 했다. 이름도 거창하게 <아즈망가 대왕>이다.

현재 일본의 월간 <전격 대왕>에 연재중인 <아즈망가 대왕>(국내판 대원씨아이)은 현실감 넘치는 여고생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네칸 개그 만화다(제목은 아마도 만화가의 이름인 아즈마와 망가(漫畵)를 결합하고 연재 잡지의 대왕을 붙여놓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 내에서는 단행본 3권까지 누계 137만 부를 돌파해 확실한 인기를 몰아가고 있으며, 4월8일부터 <TV 도쿄> 등을 통해 방영될 애니메이션은 그 인기를 새로운 단계로 올려놓을 것으로 보인다. 만화 자체에서부터 충실히 기획된 캐릭터 상품은 이미 한국에서도 전문 숍을 통해 그 얼굴을 알려나가고 있고, 반다이에서 플레이스테이션2용으로 제작하는 게임이 내년 봄에 등장할 예정이어서 만화-애니메이션-게임-캐릭터의 산업 고리를 빠른 속도로 꿰어나가고 있다.

여고생 이야기, 연애는 빼고

<아즈망가 대왕>의 인기는 여러모로 우수이 요시토의 <짱구는 못 말려>를 떠올리게 한다. 90년대의 인기 경쟁작들인 <드래곤 볼> <슬램덩크>에 비교해 볼 때, <짱구는 못 말려>는 메이저 만화잡지도 아니고 메이저 장르도 아닌 영역에서 등장해 전국적인 인기를 끌어모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 인기의 핵심은 귀엽고 단순한 주인공, 그리고 현실감 있는 소재에서 끌어온 확실한 유머다.

<아즈망가 대왕>은 아니메 스타일(일본 애니메이션의 정형적 그림체와 그 세계)을 공개적으로 표방하는 다분히 매니아적인 잡지에서 등장해 그 인기의 폭을 급속도로 넓혀가고 있다. 만화가 아즈마 기요히코는 데뷔 뒤 <천지무용> <대운동회> 등 근친 아니메 세계를 패러디한 단편들을 발표해오다, <아즈망가 대왕>의 연재에 이르게 되었다(이들 작품은 <아즈망가 대왕 리싸이클>이라는 작품집으로 묶여 있다). 동인지 만화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이 세계는 상당한 폐쇄성을 가질 수도 있지만, <아즈망가 대왕>은 그러한 마니아적 색채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초등학생의 나이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치요와 그녀의 동급생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거의 언제나 수업, 아르바이트, 캠프 등 실제 여고생들의 생활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무엇보다도 연애문제가 배제되어 있어서 ‘여고생만화=순정로맨스’라는 폐쇄적 틀을 확실히 벗어나고 있다. <짱구는 못 말려>가 만화가의 어눌한 그림 때문에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거치면서 그 캐릭터를 계속 갈고 닦아야만 했지만, 이 만화는 원작 자체의 선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어서 캐릭터 상품으로 연계시켜 나가는 데도 상당한 용이함을 보여준다.

팀플레이로 펼치는 개그

물론 계획된 상품으로서 <아즈망가 대왕>과 비슷한 전략을 가진 작품들은 있다. 중요한 것은 <짱구는 못 말려>에서도 드러나듯이 만화적 완성도가 아니라, 독자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캐릭터의 명료함과 독자들의 배꼽을 빼앗아버리는 개그 기교다. <아즈망가 대왕>은 특정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철저한 팀 플레이를 펼치고 있다. 나이에 맞지 않게 똑똑하고 모범적이지만 왠지 놀려주고픈 순진함의 대명사 치요, 훤칠한 몸매와 운동 신경으로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지만 사실은 고양이를 너무나 좋아하는 사카키, 안경 탓인지 대범한 모범생으로 보이지만 다이어트에 지나친 신경을 쓰는 요미, 그리고 시골에서 온 오사카와 기분파 토미 등 어느 쪽을 메인 캐릭터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주인공들의 개성과 비중은 방사형으로 잘 흩어져 있다. 이러한 다채널의 캐릭터와 아니메 스타일이라는 제한성 때문에 주인공들의 ‘최초 각인’은 다소 더딘 편이지만, 한번 각인된 인물의 성격은 개별 에피소드를 통해 계속해서 살아나 다시 읽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최근 개그만화의 경향이 두말할 것 없이 엽기성과 도발적 자극을 중심에 놓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이 만화의 편안하고 선량한 세계관은 오히려 두드러진 개성이 되고 있는 듯하다.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면서도 결코 상대를 과도하게 공격하지 않는 여학생들의 세계는 참으로 낯익으면서도 왠지 잊어버리고 있던 어떤 웃음의 세계를 되찾게 해준다. 직접적인 혈연 관계는 찾을 수 없지만, <보노보노>가 만들어낸 솔직하고 편안하며 없는 듯 있는 유머의 느낌이 이 만화에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기본적으로 네칸 만화의 구성을 하고 있지만 네칸으로 완결되지 않는 이야기를 다음 네칸으로 이어가며 웃음을 덧칠해가는 방법 역시 <보노보노>에서 가장 훌륭한 예를 보아온 것이다. 이명석/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