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봄으로 들어가는 요즈음은 크리스마스와 가장 상관없는 계절인 듯 싶다. 가을과 겨울에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거나 지나가 낯설지 않고, 차라리 여름은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두개의 모순된 상징이 충돌하며 오히려 효과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게다가 한 여름에 생각하는 크리스마스의 풍광은 얼마나 시원한가!). 그러나 겨울의 무거움을 떨어버리려는 봄에는 크리스마스와의 특별한 인연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눈 오는 풍광이나 지나간 트리, 구세군의 종소리 따위의 이미지도 낯설고, 지난 크리스마스를 추억하기도 고작해봐야 몇 개월이 흐른 뒤여서 쑥스럽다.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색상인 빨강과 초록으로 데커레이션되어 있고, 하얀 눈을 맞고 서 있는 코트 입은 주인공들의 모습이 그려진 <그녀들의 크리스마스>는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의 여왕 봄에 맞지 않는 불협화음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새콤달콤쌉싸름’한 크리스마스의 기억이라니. 카피치고는 세월의 흐름에 둔감한 것이다. 단 한줄로 늘 일상의 소소한 떨림에 귀 기울이고 있는 한혜연 만화를 크리스마스의 이미지에 편승한 멜로물로 만들어버리는 고약한 것이기도 하고.
한혜연의 강점은, 그가 살인사건을 다룬 형사물을 그리건 사랑이야기를 그리건 여자들의 삶에 대한 단편을 그리건 간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미세한 감정을 잡아내는 데 탁월하다는 점이다. 막상 만화를 보면 “뭐 이런 감정쯤이야, 별거 아니야”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만화로 끌어내 칸 안에 펼쳐내는 작가는 많지 않다. 표제작 <그녀들의 크리스마스>는 4명의 여성(A, B, C와 나레이터 D) 사이에 벌어진 특별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야기다. 경주로 간 고등학교의 수학여행. 반에서 늘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던 4명은 어느 조에도 배정받지 못하고 그들만의 방에 모이게 되었다. 조용히 한방에 앉아 시간을 보내던 그들 사이에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로 밤을 새웠고, 비밀을 공유한 패거리가 되었다. 그들이 고3이 되고 대입시험을 본 뒤 작은 까페에 앉아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우연히 제의한, 5년 뒤 크리스마스에 다시 만나자는 제안. 그리고 5년이 흐른 그 자리에 화자인 D가 앉아 친구들을 기다린다. 시간이 지나 친구들이 들어오고, 5년 전의 약속처럼 남자친구를 데려와 친구들에게 소개시킨다. 5년 전의 이미지와 변한 것이 없는 A, 유부남을 사랑하고 있는 B, 여자를 사랑하는 C, 늘 까페를 찾다 그 까페를 운영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 D. 나도 한번은 해본 ‘몇 년이 지난 뒤 크리스마스에 다시 만나자’는 상투적인 이야기가 따뜻한 사람과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을 만들어낸다.
다른 네편의 단편도 마찬가지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매해 12월15일자에 발표한 작품들은 하나같이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한 이동통신회사의 광고카피로 익숙한 ‘사람과 사람,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카피는 한혜연의 만화를 설명하는 가장 단순한 문장이다.
마음 상했을 때, 친구가 간절할 때
긴 머리 때문에 모델에 캐스팅된 후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친구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찾아온 단 한명의 친구. 화상 때문에 늘 모자를 쓰고 있어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지만 둘은 아무도 없는 크리스마스에 서로를 이해하고 엇갈림 커뮤니케이션을 다시 정상으로 되돌리게 된다(<크리스마스 선물>). 그리 친하지 않지만, 임신한 친구를 만나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는 것처럼 어려운 시간을 함께하는 주인공(<크리스마스 사막>). 동호회에 가짜 대학생으로 나온 두 사람의 진실과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 정확한 사실도 아니면서 12월25일이 예수의 탄생일이라고 믿는 것과 같은(<가짜 크리스마스>). 오래 전 친구에게서 경험한 상처를 회복하게 된 크리스마스(<크리스마스에 말하라>).
이처럼 한혜연이 그린 크리스마스에는 사람이 있고, 사람들이 느끼는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을 잔잔하게 퍼지게 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한혜연은 한정된 지면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감정을 독자들이 효과적으로 공명할 수 있도록 주파수를 맞추는데, 그 방법으로 일상적인 상징을 사용한다. 머리카락 없는 주인공이 머리카락이 너무 예쁜 주인공에게 마지막 선물로 가지고 온 머리핀, 임신한 배를 숨기는 산타클로스 옷, 자신을 속이고 파리에 간다고 동호회를 떠난(그러나 그것이 거짓이란 것이 너무나 명백한) 상대방이 보내온 파리발 엽서, 둘을 가장 가까운 사이로 만든 친구 아버지가 만든 붕어빵처럼 일상에서 만난 작은 사건과 물건들은 그 사람의 기억을 일깨워 주고, 그 기억은 사람에 대한 감정을 건져내고, 사람에 대한 감정은 일정한 파장을 만들어내 우리의 마음에 공명한다. 그래서인지 이 만화는 무척 따뜻하다. 계절과 어울리지 않지만 세상에서 마음 상했을 때, 나를 이해하는 친구가 그리울 때 나를 위로해 주는 책이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