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봄나물 냄새나는 시골을 만나고 싶다. 쾌락의 스카이 라운지에서 바라보는 불야성의 도시도 좋지만,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산길을 헤치고 나가 하늘 가득 펼쳐진 은하수에 빠져버리는 꿈도 그립다. 그런데 참, 만화에는 없다. 눈부신 미래와 복잡한 도시, 그 번쩍번쩍한 이야기들은 번식에 번식을 거듭하지만, 산뜻한 시골의 정경 하나를 그려내는 만화를 만나기는 어렵다. 이 만화책들을 만들기 위해 수없이 잘려나간 나무들의 고향, 그곳으로 만화도 달려가고 싶을 텐데….
모든 사라진 것에 대한 향수
<내 파란 세이버>에서 그려지는 시골의 정경은 작품에 담긴 스피드에 대한 묘사나 정치적 은유를 넘어, 참 아름답다. 볏집을 썰매 삼아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던 언덕, 자전거가 지나가는 논두렁 밭두렁에서 귀를 어지럽히는 개구리 소리…. 주인공의 방에 찾아든 소녀조차 풀숲에 날아온 작은 새처럼 묘사된다. 작품의 옆길에 끊임없이 쿵쾅거리며 달려가는 시간의 기차(산업화와 민주화로 치닫는 시대) 때문에, 이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더욱 커진다. 허영만의 <오 한강> 역시 해방 전후를 배경으로 ‘과거’를 묘사하지만, 이러한 서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풋풋한 시골의 서정을 그려내는 만화는 참으로 상쾌하다. 겨우내 쌓여 있던 눈이 스르르 녹아버린 어느 날 새벽, 논두렁 귀퉁이에서 처음 돋아난 쑥 냄새를 맡는 것 같다. <화전 소년전> <피아노의 숲>의 이시키 마코토는 시골 마을에서 살아가는 야생의 소년을 주인공으로 코믹하고도 상쾌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화전 소년전>은 죽었다 살아나서 귀신의 말을 들을 수 있게 된 소년의 이야기인데, 이 개구쟁이 소년의 행동은 정말 도시의 아이들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의 시골은 참 닮은 점이 많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피아노의 숲>에서는 숲에 떨어진 소년이 그곳에 버려진 낡은 피아노를 두드리며 처음 세계와 교감을 하고, 이후 야성의 피아니스트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다소 복고적인 화풍이 촌스럽게도 느껴지지만, 어쩐지 10년, 20년 전의 만화를 보는 듯한 맛이 나쁘지 않다.
떨어진 거리만큼 낯선 삶
사실 단순한 시골이란 없는 법이다. 구체적인 시골이란 항상 서울과는 다른 말을 쓰고, 다른 생활을 펼쳐나가는 ‘지역의 특성’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TV 드라마 <전원일기>를 보면서 왠지 시골 같지 않다고 느낀 것도 그런 때문이 아닐까 여겨진다. 아마도 지역감정을 유발할까봐, 경기도를 소재로 삼았던 것 같은데…. 차라리 충청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쓰던 코미디 프로그램이 더 시골스럽게 느껴졌다.
일본에는 홋카이도(北海道) 만화라고 한 묶음을 엮어도 될 만큼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만화가 많다. 일본 중심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고 원주민 아이누족이 아직 남아서 독자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곳인데, 자연과 문화적 환경도 상당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특히 겨울이면 폭설로 별천지가 되어버리는 이곳 자연의 정경이 오묘한 뉘앙스를 만들어내기도 한다(<러브레터> <역> <하나비> 등의 영화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만화가로서 무언가 다른 것을 그리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곳처럼 덜 도쿄적이고 덜 도시적인 이야기들을 풍성하게 묘사해낼 공간은 별로 없을 것이다.
<동물의사 닥터 스쿠르>도 시골 수의과 대학의 생생한 정서를 전해주고 있다. 이 만화에서는 농사짓는 시골은 아니라도 단순히 도시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 색다른 사건들이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겨울이면 항상 엄청난 폭설로 교통이 두절되어 갖가지 해프닝이 벌어진다. 이 만화의 최고 인기 스타인 시베리안 허스키 ‘꼬마’가 그 눈 속에서 멋진 솜씨를 보인 탓에, 일본 내의 시베리안 허스키 가격을 10배 이상 폭등시켰다고 한다.
같은 착상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가 가장 매력적인 만화의 공간이 될 법도 하지만, <아일랜드> 같은 작품은 오히려 제주도를 국적불명의 기괴한 장소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하루방이나 해녀가 나올 뿐이지 진짜 제주도스러운 맛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제주도 자체가 너무 관광지역으로 발전해온 탓에 토속의 느낌이 많이 사라지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그곳만의 독특하고 재미있는 정경을 누군가 그려줄 수 있지 않을까? <나니와 금융도> 같은 만화는 일본의 지하 금융세계를 다룬 리얼리티도 훌륭하지만, 오사카라는 지역세계를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해낸 것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된장과 사투리가 시골인가
꼭 시골이라고 된장냄새 나고, 사투리에 섞인 우스꽝스러운 사건들만 벌어지란 법은 없다. <러버스 키스> <기린관 그래피티> <천연의 꼬꼬댁>은 도시에서는 그려내기 어려운 시골의 서정으로 아름답고 애틋한 러브 스토리를 펼쳐낸다. 한편으로는 시골의 완고함 때문에 달아나고 싶고, 또 한편으로는 그곳의 정경 속에 숨어 있는 고유한 추억들 때문에 떠날 수 없다. 그들의 첫 키스는 클럽의 화장실이 아니라 달빛이 쏟아지는 갈대밭, 그들 이별의 증인은 지하철의 무책임한 인파가 아니라 인적없는 해변의 수많은 모래알들이다.우리 만화 속 시골은 왠지 이희재의 <간판 스타>나 오세영의 단편 문학관에 나오는 것처럼 상처받고 소외된 곳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사실 도시들에 따돌림당해온 우리 시골의 진정한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것이긴 하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엔 누군가 정말 시골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밝게 그려주었으면 한다. 김동화의 <황토빛 이야기>가 그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모습이었으면 더욱 좋겠다.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