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를 보다보면 그 안에서 반짝이는 작품과 작가들이 있다(발랄하거나 드로잉이 뛰어나거나 주제가 특이하거나 어떤 의미에서라도). 작품이 반짝인다는 수사는 쉽게 이해되지만 작가가 반짝인다는 말은 낯설다. 작가가 반짝인다는 의미는 작품에서 작가의 특징이 강하게 발견된다는 점이며, 칸과 칸 사이에 작가의 모습이 비친다는 이야기다. 작품에 비치는 반짝이는 작가의 모습은 자기의 작품세계를 추구하는 진정성에서 오기보다는 순발력에서 온다. 잡지 연재를 하는 작가에게 순발력은 필요충분조건이지만 그것이 만화의 모든 것을 충족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순발력 있는 작가일수록 데뷔 초기에 혜성처럼 빛나다 점점 사라지고 마는 경우가 많으며, 반대로 우직한 작가일수록 자기완성의 끈기를 보여준다.
제2의 천계영, 황숙지
천계영 이후 신인작가 부재에 시달리고 있는 순정만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황숙지는 순발력 있는 작가, 반짝이는 작가라는 꾸밈이 어울리는 작가다. 단편은 물론 최근 연재중인 <사랑과 정열에게 맹세!!>라는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감상은 반짝이는 재능을 소유한 작가의 그림자다. 이들 만화는 작가 황숙지가 몇명의 주인공으로 역할을 바꾸어가며 등장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전혀 성격이 다른 쌍둥이 자매가 각각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만 사랑이 엇갈린다는 단순하면서도 대중적 호소력이 존재하는 설정에 실려 이야기는 시트콤 주인공들처럼 성격화된 캐릭터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 비유하자면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비키니 미녀가 활보하는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타는 서핑과 같다.
비키니 미녀와 야자수, 해상구조대가 등장하는 백사장은 익숙한 설정이다. 이는 우리에게 몇번의 반복경험을 통해 주어진 완결된 이미지다. 여기에 불규칙적으로 밀려오는 파도는 바로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전체 이야기가 있고 세부 플롯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설정에 캐릭터의 힘에 의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불규칙한 생성의 곡선은 작가 특유의 개그와 입담, 만화적 상상력과 재능에 의해 유지된다. 황숙지의 첫 연재작이자 최근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랑과 정열에게 맹세!!>는 7부작 미니시리즈에서 연재작으로 변모하며 캐릭터의 힘에 의해 멋진 서핑을 타고 있다. 아직은 화려한 정점이며, 기술도 다양하지만 만약 파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서핑은 그걸로 끝이다.
황숙지의 작품과 행보는 여러모로 천계영과 오버랩된다. 황숙지는 천계영이 걸었던 신인공모전을 통해 데뷔한 뒤 단편을 통한 독자들의 인기확보 그리고 단기간으로 예정된 미니시리즈의 장편 연재 등의 수순을 밟아가고 있다. 단편집 <화장실에는 천사가 산다>는 공모전 금상 수상작을 표제작으로 해 다양한 단편을 모은 작품집이다. 황숙지는 단편을 통해 대중의 트렌드를 정확하게 반영하며, 독자들과 감상의 원심력을 유지하는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엇갈리는 2 대 2 학원로맨스다. 익숙하기 때문에 부담이 없다. 장르만화로 갖추어야 할 첫 번째 기본 조건이다. 두 번째 조건은 이해하기 쉬운, 개성이 강한 캐릭터다. 성격이 상반된 쌍둥이인 사랑과 정열은 물론 이들과 엇갈린 관계를 형성하는 난수와 유신은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특징이 강화된 인물들이다. 어릴 때부터 허약하다는 이유로 막무가내로 자라난 언니 사랑이, 그런 언니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는 내성적인 정열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디라도 쫓아가고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는 유신이, 허약해 보이지만 내성적이고 착한 난수까지. 문제는 이들 관계가 엇갈린다는 데 있다. 여기까지. 학원로맨스의 익숙한 구도가 완성된다.
서정성이라는 조미료
황숙지는 여기에 새로움을 더했다. 단편들에서 보여준 따뜻한 감성과 새로운 발상이 더해져 풍요로움을 만들어낸다. <사랑과 정열에게 맹세!!>의 서정적 조미료 중 하나는 고난수의 아버지다. 한국만화 최고의 스타일리스트인 선배 작가 이강주의 <캥거루를 위하여>에 대한 오마주임이 분명한 ‘곰’으로 그려진 고난수의 아버지는 그 모습 그대로 따뜻함을 보완한다. 난수 아버지와 어머니의 로맨스 역시 순수한 사랑, 가족의 사랑 등으로 이어지며 마음을 훈훈하게 만든다. 황숙지가 구사하는 웃음의 애드리브도 적절하다. 부족한 서사의 틈을 메우는 애드리브가 아니라 적절한 순간에 터지는 애드리브는 공감을 이루는 세대의 웃음과 함께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재미있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애초에 작가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독자의 인기에 의해 작가의 재능을 소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부분이다. 미니시리즈에서 장편 연재로 바꾸지 말고 차라리 처음부터 장편을 기획하고 시작하게 기회를 주는 것이 순서이지만 한국의 잡지는 인기순위가 모든 정석을 갈아치운다. 계획없는 연재는 작가의 재능을 갉아먹고 이야기의 힘을 무력화시키며, 개그의 남발로 감동의 힘을 약화시킨다. 다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그래서 나는 반짝이는 작가들, 특히 신인들의 그 빛을 잡지에서 발견하게 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