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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ivision] <숲은 살아있다>
2002-02-28

12달 요정을 만나다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TV에서 우연하게 본 애니메이션 시리즈물이 맘에 들었다 해도 1화부터 꾸준하게 녹화할 수 있는 근면한 성격이거나 학원에 가지 않는 초등학생 정도로 한가하지 않은 이상 시리즈물의 전화를 보기 힘들다. 나중에 비디오로 보면 되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국내에서 출시되는 애니메이션 비디오는 보통 60분(2화 분량) 기준으로 10개 미만으로 나오기 때문에 26화 이상인 시리즈물은 <드래곤볼>이나 <포켓몬스터> 정도의 인기가 아니면 전편이 제대로 출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따라서 CATV에서 방영된 <지구방위가족> <레인> 같은 소수 마니아층 성향의 작품, 혹은 방학이나 연휴 때 방영되는 <공룡아 불을 뿜어라>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단편으로 끝나는 특선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게 되면 그 작품을 다시 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 하는, 거의 저주에 가까운 일이 발생한다. 필자만 해도 어릴 때 명절날 방영된 <재크와 콩나무>나 <백사전>같은 작품을 다시 한번 보고 싶은 마음에 수천, 수만개의 비디오가 쌓여 있는 황학동 비디오도매상이나 일본 아키하바라의 비디오샵을 몇 년 씩 뒤지고 다니던 경험이 있었다.일본의 `IVC`는 클래식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전문으로 기획, 제작하는 회사다. 이곳에서 <눈의 여왕>이나 폴 그리모의 <왕과 새> 같은 DVD를 출시한 덕분에 희귀 LD를 구하려는 노력이나 지글거리는 저화질의 복사본을 봐야 하는 고생을 덜 수 있게 됐다. 역시 이 회사에서 출시된 1956년작 러시아애니메이션 <숲은 살아있다>는, 러시아의 동화작가 사무일 마르샤크의 원작에 바탕해 구소련 애니메이션의 거장인 이반 이바노프 바노가 연출한 명작.제멋대로인 여왕이 엄동설한에 봄꽃을 가져오는 자에게 큰 상금을 주겠다는 공고를 내자, 욕심많은 모녀에 떠밀려 겨울 숲속으로 꽃을 찾아나선 소녀가 12달의 요정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원작 자체가 무대에서 먼저 인기리에 공연되었던 영향 탓인지 마치 한편의 연극을 보는 듯 유려하게 흐르는 동작과 대사들, 절대권력이나 관료주의를 은근히 비꼬는 듯한 풍자성 등은 디즈니와 다른 러시아 애니메이션의 힘과 시간을 뛰어넘는 `클래식`의 전형을 느끼게 해준다. 국내에서는 80년대 명절날 시간 때우기용으로 이란 제목으로 방영됐지만 정식으로 출시된 적이 없기 때문에, 비록 일본어 더빙으로 출시됐다 해도 이 작품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는 사람에게는 큰 행운일 것이다.스토리는 같은데 그림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같은 원작을 가지고 일본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을 봤을 것이다. <명작극장>풍의 캐릭터가 나오는 이 작품은 국내에 이란 제목으로 출시됐다. 예전 그대로의 한글 더빙으로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GOLD STAR`(지금의 LG)란 딱지를 달고 1986년에 나온 비디오라 오히려 더 구하기 힘들 수도 있다.최근 <은하철도999>나 <마크로스> 같은 추억 속의 애니메이션들이 국내에서 속속 DVD로 출시되는 복고 바람이 불고 있는 가운데, 1976년작 <로보트 태권V>가 2월 말에 출시될 예정이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최대한 좋은 화질을 위해 원본 필름을 찾아다닌 노력을 기울인 타이틀이라 화질이나 음질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를 계기로 어린 시절 추억 속에만 묻어뒀던 많은 애니메이션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김세준/ 만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neoeva@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