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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홀랜드 드라이브> O.S.T
2002-02-21

이 빠진 퍼즐, 혹은 잃어버린 삶

이 작품은 대가의 실패작이다. 데이비드 린치는 기괴한 신체적 편린과 공포스러운 분열의 기억을 섬광에 찔린 듯한 표정에 연결시키는데, 그것을 대개 역순으로 배열하거나 뒤섞는 방법으로 플롯화시킨다. 관객은 표정을 먼저 보고 그 이면을 나중에 알게 되는 식이다. 그렇게 하여 미국의 삶 이면에 존재하는 도착을 도착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이 린치 영화의 핵심이었는데, 이번 영화에서 절망과 공포는 표정과 분위기에만 머무른다.

그렇다 해도 이 영화는 매혹적이다. 데이비드 린치가 주목하는 것은 이제 매혹의 매카니즘 자체인 것 같아 보인다. 그래서 그가 거의 도착적으로 집착하는 것이 ‘50년대’이다. 린치에게 50년대는 가짜 매혹의 시스템이 완결된 시대이다. 그는 이 가짜를 숭배한다. 이 가짜는 가장 미국적인 것이고 린치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50년대가 파멸의 원인이기도 하다는 것. 린치는 그것을 알고 있으며, 표현해내려 한다. 50년대식 TV쇼가 펼쳐지는 오디션 장면에서 흐르는 <I've Told Every Little Star>는 압권이다. 두왑 스타일의 보컬 캄보 가운데에 있는 마론 인형 같은 여가수. 오디션을 하던 감독은 마치 홀린 듯 “저 여자야” 하고 호명한다. 그 호명의 배경에는 마피아가 있다. 이 장면은 50년대의 구조를 극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린치를 포함한 전 미국의 모든 10대가 그와 같은 TV쇼 장면에서 ‘저 여자야’ 하고 호명했을 것이다. 대중문화가 무의식의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는 순간, 린치에게는 매혹적인 파멸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또 하나, 린치가 숭배하는 50년대를 상징하는 가수가 바로 로이 오비슨이다. 린치의 로이 오비슨에 대한 집착은 조금 심하다. 로이 오비슨의 달콤하면서도 어딘지 비극적이고 광적인 톤은 데이비드 린치와 잘 어울린다. 로이 오비슨의 <In Dreams>가 <블루 벨벳>에서 등장하는데, 영화의 가장 극적이고도 기괴하고 아름다운 대목에서 쓰인다. 이번 영화에서는 로이 오비슨의 <Crying>을 이탈리아 말로 번안하여 기괴하게 쓰고 있다. 역시 가장 상징적인 대목에서 등장한다. 이탈리아 여가수가 열창하는 미국 노래. 여가수가 쓰러져도 음악은 계속된다. 알고 보니 립싱크였다. 모든 것은 립싱크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 스코어는 또다시 안젤로 바달라멘티가 맡았다. 영화 맨 처음에 흐르는 지터벅 댄스 파티의 음악과 바로 그 다음에 흐르는 진짜 우울한 테마를 극적으로 잇대어놓고 있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 신디사이저 위주로 음악을 연주한다. 그의 신디사이저는 철저하게 앰비언트 풍이다. 린치는 바달라멘티의 창작곡들과 린치식으로 고른, 스타일화된 대중적 사운드를 곳곳에 적당히 배치하고 있다. 사운드 트랙에는 스스로 만들고 연주한 노래들도 몇개 들어있다. 대개가 앰비언트 풍의 트레몰로 기타와 단순한 리듬 패턴이 반복되는 곡들이다. 아마추어 뮤지션 린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바달라멘티의 음악도, 린치의 스타일화된 미국식 사운드도, 뭔가를 놓치고 있다. 아니, 일부러 놓치고 있다. 발견되는 시체, 놀라는 표정, 그 모든 것들은 그저 어떤 스타일화된 서사의 시뮬레이션들이다. 데이비드 린치는 원래 그런 것들을 이용했지만 이번엔 그런 것들만 남아있다. 관객은 피할 수 없는 퍼즐 놀이에 빠지지만 그 퍼즐은 듬성듬성 이가 빠진, 추한 틀니 같아 보인다. 핵심적인 무엇인가가 빠져 있는 삶,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자신들의 삶 자체가 아닐까.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