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웃고만 살 수 없는 걸 보니, 부유하던 몸 이윽고 현실에 착륙하려나 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씁쓸한 걸까. 작은 회사가 몇년에 걸쳐 공들여온 프로젝트를, 큰 회사가 ‘꿀꺽’하는 작태가 애니메이션계에서도 답습되고 있어서?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해서? 아니면 권력과 이해관계가 뒤엉킨 온갖 상황 때문에? 아아, 진짜 모르겠다. 복잡한 고민 따위 뻥 차버리고, 천방지축 신나게 막 살아도 좋은 이상한 세계로 떠나기로 한다.
진작부터 글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 다른 신문에 먼저 소개되어 조금 억울하긴 하지만, 1999년부터 지켜본 작품이 드디어 방영을 하는데 그만둘 수야 없지. <아치와 씨팍>의 조범진 감독이 그 이름도 아득한 ‘프로덕션 조범진팀’ 시절 기획했던 <스페이스 힙합덕>은 올 하반기 KBS를 통해 방영될 52부작 TV시리즈다. 한 에피소드 당 상영시간은 11분으로, 에피소드 두개가 함께 묶여 소개될 계획이라고. 앞서 말한 ‘꿀꺽’의 경우가 아니라, 합리적인 계약을 통해 바통을 이어받은 선우엔터테인먼트가 캐릭터부터 시나리오까지 다시 손보면서 <스페이스 힙합덕>은 새롭게 태어났다. 주요 캐릭터야 원래의 이미지를 그대로 살렸다고 하지만, 애초 별나라 각 행성을 돌면서 신화를 기초로 펼치려던 이야기가 힙합 소행성을 근거지로 각 행성에 아르바이트 다니는 에피소드로 바뀌었다.
주요 등장인물은 왕자와 힙합덕, 아르고다. 엉뚱하고 삐딱한 힙합덕은 생활력 강하고 성격 드센 오리 소녀. 다혈질 오리녀는 왕자를 대놓고 무시하지만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없이 심부름센터를 함께 운영한다. 히어로인 왕자는 물론 이름만 왕자. 소심하고 구시렁대기 좋아하는 무기 마니아다. 비유하자면 <순풍산부인과>의 표 간호사 같은 성격으로 드센 힙합덕에게 빌붙어 살고 있다. 아르고는 이들이 모는 유기체 우주선이다. 그 옛날 <전격 Z작전>의 마이클과 자동차 키트의 관계랄까. 성격은 만만디, 뭐든지 모아놓는 만물상이다.
혼자 힘으로 잘살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힙합덕이 자립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심부름센터’는 출범한다. 어떻게저떻게 힙합덕은 왕자를 만나 함께 심부름센터를 운영하게 된다. 이들은 성격 죽이며 힙합 소행성 도심 속 108층 빌딩 옥상에서 근근이 살아간다. 물론 사건이 없을 리 없다. 뜬금없이 몬스터인 버기들이 나타나 이들을 괴롭히면서 일상은 무너지는데…. 1화 ‘아기보기는 정말 싫어’에서 이들은 아기를 전문으로 봐주는 베베행성의 아기보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수많은 아기들이 쉴새없이 울어대고 기저귀에 ‘쉬’를 한다. 아기들을 돌보느라 지친 힙합덕과 왕자는 그제야 난리법석의 원인인 쉬버기를 발견한다. 쉬버기는 쉬 소리로 사람들을 자극해 홍수가 나게 만드는 것이다. 거참, 발상도 독특하지.
상상을 초월하는 버기들의 모습도 참신하다. 눈이 여러 개 달렸거나 물고기 모양에 두 다리 달린 것들은 그나마 양반 축. 컬러와 형상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빚어내는 상상력이 가히 놀랍다. 스탭으로는 <마일로의 대모험>을 맡았던 소현희씨가 프로듀서를, <슈퍼 패밀리>의 주홍수씨가 감독을 맡았다(<슈퍼 패밀리>는 프레임엔터테인먼트에서 계속 진행중이다). 형식은 2D 애니메이션. 어쨌든 <스페이스 힙합덕>은 상당히 요란하고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이 될 것 같다. 그렇게 기대한다. “지루하게 늘어지는 이야기보다는 간단한 스토리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겠다는 이 작품에서는 음악 ‘힙합’도 중요한 코드다.
그런데 천방지축 신나게 막 살아도 좋은 그곳에서도 먹고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구나. 그럼 복잡한 상황 역시 있겠네? <스페이스 힙합덕>은 제법 현실적이었군. 그렇다면 “무서워라, 마지막에 남는 것은 씁쓸함뿐이다. 삶의 어디에도 풍요함은 없단 말인가”.(김현이 쓴 <동키호테의 탈출> 서문 중) 김일림/ 월간 <뉴타입> 기자 ill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