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마케팅 방법의 하나로 굳어진 가수들의 은퇴발표와 달리 작가의 절필 선언을 접하는 마음은 무겁고 우울하다. 글을 써서, 그림을 그려서 자신을 표현하는 작가들의 절필 선언은 그동안 작품을 통해 유지해온 커뮤니케이션의 단절로 이어지게 된다.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는 순간, 대화의 상대로 존재하던 나의 상실감 역시 작가의 상실감만큼이나 커지게 된다. 이를테면 1996년 1월6일 이후 다시는 김광석의 노래를 들을 수 없다는 그런 상실감 말이다. 이정애의 홈페이지에서, 그리고 몇몇 만화 사이트의 게시판에서 발견한 “안녕하세요. 독자여러분”으로 시작되는 이정애의 글은 나에게 커다란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이정애는 대학 재학 시절 황미나의 문하생이 된 뒤 1986년 <보물섬>에 단편을 발표한 뒤 첫 장편 <헤르티아의 일곱기둥>을 발표한다. 이정애의 매력은 잡지에 연재한 단편들을 통해 발산되었다. 그의 첫 단편집인 <일요일의 손님>에 실린 여러 단편들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상식을 넘어서는 매혹과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는 <변형>이라는 단편에서 이를 ‘공명’(共鳴)이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루이스씨에게 봄이 왔는가>에서 보여준 강렬한 스타일과 문어체의 대사와 내레이션은 그의 작품에서만 발견되는 세련됨이다. 섹스를 하다 말고 논하는 철학이나 문화에 대한 토론은 서사에서 어긋나 유치해지지만 이정애의 만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뱉어내는 문어체의 대사는 자연스럽다. 문어체 대사를 통해 조성된 이정애 만화의 아우라는 줄거리 중심의 빠른 독해를 방해하면서 독자에게 사고를 요구한다.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류의 삶과 구원이라는 거대한 주제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는 <열왕대전기>는 대화뿐만이 아니라 거대한 상황설정을 통해 사색을 요구한다. 독특한 기숙학원물에서 꽃미남들의 러브러브로 넘어가더니 종내에는 인류의 구원과 각성, 그리고 신과 인간의 삶에 대한 접근을 보여준다. 독자들은 최고의 기숙학원물에 느닷없이 나타난 발랄한 개토의 유머와 꽃미남들의 빛나는 얼굴에서 시작해 서서히 작품 속으로 들어가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 거대함과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된다. 적어도 이정애 만화를 읽기 위해서는 작가가 건네는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 세상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정애 만화를 읽다보면 때론 당혹스러울 수 있다. 여러 단편이나 <소델리니 교수의 사고수첩>에서 보여준 동성애 취향은 이성애자인 당신을 혼돈스럽게 만들 것이며, <바스 앤 샤워>에서 보여준 살인사건은 독실한 보수적 종교주의자인 당신에게 혼란을 줄 것이다. 이런 당혹스러움은 작품의 삭제와 훼손, 연재중단 등을 가져왔다. <열왕대전기>는 두 번 매체를 옮겼으나 중도하차했고, <소델리니 교수의 사고수첩>은 잡지의 폐간으로 중도하차했다.
게다가 오랜만에 인터넷을 통해 연재한 <사일런트 리밋>은 코믹스 투데이의 경영불안에 연재 중단과 작가의 절필선언으로 마지막 중도연재 작품으로 기록되었다. 현재 단행본 2권이 출판된 <사일런트 리밋>은 독특하게 퇴마물이다. 이미 <열왕대전기>에서나 <바스 앤 샤워> 그리고 여러 편의 단편에서 다양한 종교적 상징이 교차하는 도전적인 종교관을 보여준 바 있지만, ‘퇴마’라는 소재를 통해 구현되는 것은 처음이다. 퇴마의 구도는 자신의 몸에 악귀를 받아들여 정화시키는 퇴마사이자 정신과의사인 김소운와 아수라의 환생을 막기 위해 한국으로 온 스님의 대결구도로 유지된다. 스님은 악한 것을 막기 위해서는 그것을 완전히 소멸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김소운은 그것도 생명인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김소운의 후배 의사와 아수라가 빙의해 정신분열증에 걸렸다가 김소운에 의해 깨어난 재벌집 소년이 김소운을 두고 벌이는 감정싸움까지 이야기의 한축을 차지한다. 이정애는 이 만화를 통해 전작들보다 더 쉽고 보편적인 톤으로 생명과 구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결말을 보기는 힘들 것 같다.
그가 더이상 만화를 그릴 수 없는 이유는
“제게 만화는 일이라기보다는 거의 놀이에 가까웠지요. 아니, 사실 놀이였습니다. 정말 잘 놀아왔지요. 어느 순간부터 그게 더이상 놀이일 수 없게끔 하는 상황…. 만화 사태니, 청보법이니, 줄줄이 폐간되는 잡지니, 하던 작품들이 거의 타의에 의해 중단되는 사태 (중략) 아아, 그런데 이제 한계인 거 같습니다.”(2001년 12월26일 이정애 홈페이지 게시판)
그렇게 그는 떠났다. 그를 사랑하는 많은 독자들은 프로로 활동하는 작가 이정애의 작품을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연재 작품인 퇴마만화 <사일런트 리밋>의 주인공 김소운은 자신의 몸에 온갖 악귀들을 받아들여 원한을 정화시킨다. 죄를 묻기보다는 구원을 주는 정신과 의사 김소운처럼 이정애는 한국만화의 중첩된 모순을 끌어안고 떠났다. 그대 잘 가라! 무려 16년 동안 만화를 통해 당신과 나눈 대화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소중한 만화를 우리에게 준 그대 잘 가라.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정호승 시, 김광석 노래) 박인하/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