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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방영 앞둔 시리즈물 <넷보이>
2002-01-17

유치찬란해서 좋아

복잡한 세상사를 잊는 방법 하나! 단순한 설정 속으로 빠져드는 것. 선남선녀가 사랑을 이루고 영웅이 세계를 지켜내는 이야기는 그래서 여전히 유효하다. <넷보이>(Net Boy)는 단순함에 유치찬란함까지 표방하는 26부작 TV시리즈다. 세상사의 애매함과 복잡함은 쏙 제거한 2D 애니메이션.

<영혼기병 라젠카>와 <붐이담이 부릉부릉>의 이성진 프로듀서가 이끄는 이 작품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컴퓨터를 소재로 하고 있다. 21세기에 걸맞게 컴퓨터를 배경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이 자주 등장하는 요즘이지만, <넷보이>는 ‘도스’라는 용어조차 생경했던 시절부터 기획됐다.

지난해 2월이었던가, 이윽고 독립한 이성진 프로듀서가 누렇게 바랜 연습장 한권을 불쑥 내밀었다. <…라젠카> 시절부터 구상해왔다는 <넷보이>가 거기 있었다. 그때는 이미 <넷보이> 프로모션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얼룩지고 색바랜 연습장은 감동적이었다. 오랜 담금질을 거쳐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결정체에 대한 마음이 언제나 그러하듯. 이 작품에는 다섯명의 영웅이 등장한다. 독수리 5형제를 떠올려도 불손(?)하지 않다. 넷마을에 사는 넷보이는 주인공답게 영리하고 활달하며 리더십 강한 소년. 그는 ‘착한 편’의 대모인 닥터 클린의 기지에서 평화를 위협하는 닥터V에 맞선다.

그와 함께하는 네명의 친구들을 들여다보자니, 과연 전형적인 가운데 약점이 출중하지 않은가. 새침데기 램은 건망증이 심하고 뺀질거린다. 수시로 거울을 찾는 것은 그녀의 특기. 큰누님 같은 윈더는 수다스럽고 투덜대기 일쑤다. 허리에 손얹고 잔소리하는 모습이 일품. 뚱보 엔터는 의외로 행동이 빠르지만 먹을 것에 약하다. 혹시 감정표현이 즉각적이라면, 엔터에게 감정이입을 해도 좋을 것이다. 제멋대로인 것 같은 이 그룹에도 차디찬 이성을 지닌 존재가 있으니 바로 베이다. 실험실에서 생활하면서 불로장생약을 만들고자 도전한다. 발명을 위한 드라이버 세트를 항상 지니고 다니지만 왜 그렇게 잘 넘어지고 부딪치는지.

‘나쁜 편’의 대부는 닥터V, 즉 바이러스다. 유치하고 치사하기 짝이 없는 놀부 아저씨의 야망은 넷마을을 오염시키고 세계를 정복하는 것. 그런데 <은하철도 999>의 차장 복장을 한 이 아저씨는 어벙한 부하 버그와 딜리트 때문에 도대체 해뜰 날이 없다. 끈기있고 성실한 악당 버그는 물론이요, 약삭빠르고 출세지향적인 소녀 딜리트가 해대는 실수란 귀엽기 그지없다. 버섯돌이 스타일의 분홍색 머리를 한 딜리트는 가장 기대되는 캐릭터다. 밉지 않은 악당들. 닥터V 기지와 닥터 클린 기지를 오가며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 1, 2, 3, 4, 5 역시 감초. 시니컬하고 무표정하지만 너도나도 닥터V 기지에 가기 싫어하는 모습들이 코믹하다.

이달 중순 완성되는 5분 분량의 데모 영상에서 본편의 매력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스타워즈>와 <매트릭스> <미션 임파서블> 등, 아는 사람은 아는 대로,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대로 즐길 수 있는 패러디가 곳곳에 숨어 있다. 과장이 아니라 상황과 대사에서 비롯되는 재미. 아케이드 게임 또한 IBS NET에서 제작중이다. 프리프로덕션을 마친 지금, 10월경이면 본편도 모습을 드러낼 계획이라고. 실제 존재하는 컴퓨터 바이러스뿐 아니라 실생활에 있는 충치 바이러스, 잠꾸러기 바이러스를 영웅들이 어떻게 물리쳐갈지, 그 상황과 대사가 정말 기대된다.

이성진 프로듀서를 비롯한 Rex Studio 스탭들은 ‘역사에 남을 위대한 작품’을 만들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타깃의 눈높이에 맞춘 재미있는 작품, ‘유치찬란’해서 이박사 음악과도 잘 어울리는 작품. 그런 작품을 만들고자 한다. 작품은, 사람들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 오랜 담금질을 끝내고 마침내 숨쉬기 시작한 <넷보이>는, 가열찬 열정 하나로 “목숨 걸고” 작품을 사수하겠다는 사람들이 만드는 작품이기에 더욱 빛을 발한다. 김일림/ 월간 <뉴타입> 기자 ill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