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화질, 고음질’과 ‘사용의 편이성’을 바탕으로 97년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DVD의 확산속도는 놀랍다. 지난해 한해 전세계적으로 약 3천만대의 플레이어가 생산됐으며, 국내에서도 각종 경품이나 잡지 선물용으로 플레이어가 보급되면서 기기보급률이 5%대에 이르고 있다. 이미 DVD가 비디오 시장을 압도하고 있는 미국이나 일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소프트의 종류와 양도 엄청나게 늘어가는 추세다. 10만원대까지 등장한 플레이어의 가격에 비해 아직 2만∼3만원대의 소프트웨어는 부담이 될 만한 금액이지만, 일반방송이나 비디오로는 만날 수 없는 고화질, 고음질이라는 장점과 아울러 아련한 추억 속에 묻어둔 옛 영화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수요층을 넓혀가고 있다.
워너나 브에나비스타 같은 메이저가 아닌 중소업체에서 출시하는 DVD타이틀의 경우 마케팅과 기술력 등으로 대형 블록버스터 타이틀처럼 큰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최근 그중에서도 괄목할 만한 판매량과 주목도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미래소년 코난>이나 <도전자 허리케인> <은하철도 999>와 같은 고전 일본애니메이션 DVD들이다.
특히 가장 최근에 출시된 1979년작 <은하철도 999>는 일본에서 극장 개봉 당시 흥행1위를 차지했으며, 공개 첫날 몰려든 관객 때문에 연장 상영을 하며 일본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부흥기를 이끌어내면서 애니메이션의 문화적 위치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한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81년부터 84년까지 MBC에서 방영된 동명 TV시리즈를 통해 가장 많이 알려진 일본애니메이션 중 하나이기도 하다. 주인공으로서는 드물게 못생긴 얼굴인 ‘철이’(일본명 ‘데츠로’)와 그로테스크한(?) 몸매에도 불구하고 항상 미인 캐릭터 인기 순위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메텔’의 미묘한 관계라든지, ‘착한 어린이 만들기’용 주입식 주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들을 비교적 진솔하게 담은 것 등 <은하철도 999>는 여러 요소에서 당시의 다른 애니메이션과 차별성을 보여주며 많은 팬을 얻었다.
일본에서는 이례적으로 TV시리즈가 종영되기 전에 극장판으로 만들어져 개봉한 린 타로의 <은하철도 999-극장판>은, 당시 다른 인기 시리즈물의 극장판이 대부분 편집본인 데 반해 2시간여의 상영시간 안에 작품세계를 최대한 표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였다. ‘999’의 모델이 된 증기기관차(모델명 SL-C62)를 좀더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일본 각지의 교통박물관이나 철도공원 등지를 돌며 자료를 모으고, 약 2분 정도의 출발장면에서의 박진감을 높이기 위하여 1개월씩 걸려가며 1500매의 연결 셀을 그리는 등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광활한 우주의 여러 모습들과 ‘끝없이 이어지는 소년의 성장이야기’는 어린 시절 마음 깊숙이 남겨두었던 감정들을 들추어내기에 충분한 조건을 만들어준다.
군국주의 느낌이 많이 나 평이 엇갈리긴 하지만, 2001년 일본애니메이션의 최고 대작이랄 수 있는 <메트로폴리스>를 만든 린 타로의 공간감과 미의식의 초기 모습이나, 최근에 다시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일본의 대표적인 만화가 중 하나인 마쓰모토 레이지의 작품세계에서 출발점에 있는 작품을 정식 타이틀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애니메이션 마니아에게는 신매체가 가져다준 복임에 틀림없다(한 스탭의 장난기로 원작자인 마쓰모토 레이지가 카메오로 출연하니 놓치지 말고 찾아보시길…).
김세준/ 만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