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고>는 꽤 특이한 영화이다. 미래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환상이 미국의 상황 속에서 ‘고담시’를 낳았다면, 한국적인 정황 속에서는 ‘화산고’를 낳는다. ‘학교’는 한국의 기묘한 교육적 환경 속에서 먹구름에 휩싸인 음울한 판타지의 공간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이다. 감독은 기괴하게 변형된 비현실의 현실 공간에 ‘교육’ 대신 ‘무협’을 배치한다. 그리하여 교과서는 비전이 되고 선생과 학생은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에서 무림의 주도권을 쟁투하는 경쟁관계로 변한다. 과연 한국은 이런 식의 공간설정을 하는 상상력에 안성맞춤의 현실을 제공하는 것이다.
물론 이 판타지 공간은 과도하게 왜곡 포장되어 있다. ‘과함’은 이 영화의 미덕이기도 하고 결함이기도 하다. 보기에 따라서는 앞으로 컬트화될 소지도 없지 않은 그 ‘오버’는 사운드의 차원에서도 주요 방법으로 관철된다. 이 영화를 본 어느 나이 지긋하신 소설가는 ‘시끄러워서 못 보겠다’고 했다. 이 지적은 내게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지적으로 들린다. 요새 젊은 세대는 이 정도의 쾅쾅거림이 없으면 감질나서 영화를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영화는 다른 영화보다 훨씬 더 과도하게 사운드를 떡칠하고 있다. ‘기’의 흐름을 보여주어야 하는 무협신들이 많아서 그런가? 문 여닫는 장면 같은 평범한 장면을 포함한 모든 장면에서 사운드는 평균치 이상의 데시벨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런 영화의 관객은 내용을 따라가기도 하지만 그 얼얼함 자체를 즐겨 감상한다. 더군다나 <화산고>의 과도한 사운드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요인을 영화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다. 왜? 원래 오버하고 있는 영화이므로.
이 영화에서 쓰인 음악도 역시 과하다. 우선은 음악이 삽입되는 시간이 엄청나다. 음악없이 대사와 효과음만으로 처리되는 장면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음악은 계속하여 관객의 귀를 때린다. 인더스트리얼풍의 노이즈와 빅 비트풍의 반복적인 리듬, 그리고 금속성의 기타가 중심이 되는 그 음악은 어떨 때는 장면의 분위기와 상관없이 계속 흐른다. 이것도 음악을 사용하는 하나의 전략이다.
이렇게 사용된 음악은 일종의 차단막 역할을 한다. 계속하여 흐르는 그 음악은 관객의 의식이 영화가 설정한 판타지의 공간 바깥으로 되돌아오지 않도록 막는 역할을 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런 식으로 쓰인 음악이 관객을 비현실의 공간에 가두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음악은, 심리적으로는 관객으로 하여금 지루함을 느낄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사용되는 장치이기도 하다.
주제음악은 ‘RF 칠드런’이라는 록밴드가 맡았다. 시나위 출신의 베이시스트 정한종을 중심으로 결성된 이 밴드는 인더스트리얼적인 분위기와 하드 코어적인 메탈 분위기를 함께 지니고 있는 밴드. <화산고>의 디스토피아적 분위기와 어울리는 부분이 많다. 전체적인 음악은 박영이 맡았다. 우선은 엄청난 분량의 스코어를 무리없이 소화한 것에서 작곡자의 역량이 드러나는데, 그의 음악 역시 강력한 기타 배킹과 인더스트리얼적인 노이즈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RF 칠드런의 음악과 맥이 통한다.
장풍을 주고 받으며 한 합, 한 합을 맞붙는, 우리나라에서만 상상이 가능해보이는 이 기묘한 사제관계! 그런 영화의 음악이니만큼 거칠고 황당하고 무자비해야 제격 아니겠나.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